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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꽃과 나비, 2006, 나무에 단청기법, 69x95 |
차곡차곡 개켜 반닫이 위에 올려 둔 색동 이불이며 장독대 위에 떠 놓은 정화수 한 사발, 툇마루 아래 벗어놓은 하얀 고무신…. 그가 호출하는 이미지는 과거 속에 있다. 지금은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을 참 진득하게도 보여준다. 그런데 그게 고리타분한 잔소리 같지가 않다.
떼쓰는 일 없이 그저 순하기만 할 것 같은 소녀들, 뭐라 야단을 쳐도 배시시 웃기만 할 것 같은 소년들을 보면 저게 바로 우리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셋값 정도의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페이스오프가 가능하고 신윤복의 미인도 대신 밀로의 비너스가 더 아름답다고 말하는 세상이지만, 원래 우리가 지녔던 표정은 저렇듯 순박했다.
김덕용 그는 우리와 익숙한 관계를 맺었던 것들을 기억의 흔적으로 제시한다. 강아지만 해도 그렇다. 그가 그리는 강아지는 십중팔구 누렁이나 백구다. 하지만 요즘은 누렁이나 백구보다 푸들이나 치와와, 포메리안을 더 자주 볼 수 있다. 세태를 적극적으로 반영해, 만약 그가 이런 인기 애완견을 그렸다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가 조합해 놓은 기호에 균열이 생길 것이다.
捨紙取木, 종이를 버리고 나무를 취하다
그의 작품은 ‘한국적인 색채가 강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평을 받은 게 최근의 일이 아니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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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된미래, 2010, 113.5x126cm (각각) |
“그림에 소질이 있었는지 미술대회에 나가 상을 곧잘 받았어요. 그때 심사를 보던 선생님들이 한결같이 ‘네 그림에서 한국적인 느낌이 난다’고들 하시는 거예요. 그때는 주로 수채화를 그렸는데 아마도 물맛이 잘 살았나 봐요. 그런데 그런 얘기를 자꾸 듣다 보니 ‘나는 서양화가 아니라 동양화를 해야 하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데요. 그래서 서울대 동양화과에 진학했는데 저한테 그건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수순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는 그다지 무게감이 없었다. 그저 진로를 결정하게 된 요인이었을 뿐.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 ‘한국적’이라는 말은 작가적 정체성을 좌우하는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때마침 화단에서도 한국화에 대한 담론이 거세게 일었다. 이제까지 동양화로 통칭되던 그림을 한국화로 부르고, 그 뜻과 개념을 정리하자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것이다. 과연 무엇이 한국화이고 무엇이 한국적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건 그때부터였다.
“대학 때 학교 다니기 참 싫었습니다. 나는 그냥 그림만 그리면 되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닌 거예요. 준법이니 뭐니 해서 동양화에는 무슨 법이 그리 많은지 규칙이 엄격했지요. 게다가 나는 색깔 쓰는 거 하나는 자신 있었는데 격이 떨어진다고 색을 쓰지 말라지 뭡니까. 제일 잘하는 걸 못하게 하니 답답했어요. 빨리 졸업해서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리자, 내가 한국적인 그림을 찾아 나서자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대학원에 진학했는데 어느 날 박물관에서 반구대 암각화의 탁본을 보게 됐습니다. 그게 어찌나 좋았던지 거기서 착안해 나무판에 그림을 새겨서는 화선지에 찍어냈지요.”
그때 비로소 나무와 인연을 맺게 됐다. 그렇게 작업한 그림을 모아 92년도에 관훈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런데 전시장에는 고생스럽게 작업한 나무판은 온데간데없고 화선지 작품만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무판은 작업의 과정일 뿐 작품 자체가 될 수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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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의 시작,2011, 나무에 단청기법, Mixed Media on Wood, 78.3 x 7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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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을 품다, 2009, 나무에 단청기법,120x120 |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내가 정말 땀 흘리며 애정을 쏟아 부은 건 나무판 작업이었는데 그건 작품이 될 수 없는 거예요. 그 후 작업에 대한 고민이 심화됐어요. 어떻게 하면 내 감성을 담아내면서 한국적인 것을 표현할 수 있을까 싶었죠. 그러던 어느 날 무의사란 절에 갔는데 단청이 너무 낡아서 재단장을 하려고 준비 중인 거예요. 근데 그 단청을 보는 순간 가슴이 막 뛰더라구요. 바로 이거구나 싶었죠. 색 바랜 단청 속에서 한국인의 마음과 역사와 시간을 본 거예요. 단청의 나뭇결이 오천 년 역사로 이어진 생명의 결처럼 느껴졌죠.”
이후 김덕용 작가는 뒤주나 함, 반닫이 같은 전통 생활가구를 구하러 다녔다. 그것을 분해해 나뭇결이 잘 살아나게 밑작업을 한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처음 시작하는 순간에는 시행착오를 거치기 마련. 그는 원목이란 게 온도나 습도에 따라 수축하고 팽창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작품이 터지고 뒤틀리는 경험을 수차례나 한 뒤에야 나무의 물성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장지에 수묵 채색이나 했으면 그런 고생도 없었을 것을.
그는 남들이 하는 걸 그대로 따라 해서는 직성이 풀리지 않는 성미였다. 새로운 실험과 도전을 위해 나침반도 없이 북극성을 찾아가는 사람. 열사(熱沙)의 사막을 건너가는 낙타처럼 그에게는 견고한 투지가 있었다. 요즘 동양화를 전공한 젊은 화가들은 이런저런 시도로 낡은 규범과 정신에서 벗어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의 고민은 대개 화선지 위에 무엇을 표현하는가에 집중돼 있다. 그들의 무대는 아직까지 종이다. 그런데 김덕용 작가는 과감하게 종이를 버리고 나무를 취하는 파격을 감행했다.
시간의 결 속에 담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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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의 시간, 2008, 나무에 단청기법,133x1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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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부부, 2009, 나무에 단청기법, 132x112 |
어떻게 보면 그는 참 사서 고생을 한다. 쉬운 길로 갈 수도 있는데 에둘러 먼 길을 향한다. 한때 그에게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편안히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이질적인 작업 스타일로는 그렇게 되기가 힘들었다. 나무판이나 어루만지고 있는 사람을 누가 불러주랴. 하고 싶은 작업을 하려면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인 보상을 포기해야 하고, 안락함을 누리려면 나무 작업을 포기해야 했다. 양자택일. 작가로서의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는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고에서 13년 동안이나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 와중에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그의 말로는 “참 독하게 살았다”고 한다.
흘린 땀의 무게만큼 진심어린 작품이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김덕용 작가는 자신에게 엄격한데 그건 아마도 관객에게 거짓된 작품을 보여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안숙선 명창이 “소리는 바른 사람에게서 바르게 나온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말은 그에게도 적용된다. 그림은 바른 사람에게서 바르게 나온다! 그래서 그의 작품이 진한 울림을 주는지 모른다.
어떤 나무를 보면 여기에 뭘 그려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기도 할까? 그에게 물었더니 퍼센티지로 따지면 50% 정도라고 한다.
“그런 경우 많아요. 나무에서 강아지 코가 보인다든지 여성의 누드가 보인다든지 할 때요. 어떤 때는 묵은 나무에서 먼지만 좀 털어 줬는데 그림이 벌써 다 된 경우도 있어요. 옹이가 가득한 나무에 매미를 한 마리 그렸는데 나뭇결이 매미 소리를 낼 때도 있지요. 나는 내가 나무 위에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무가 스스로 자신을 그려낸다고 생각해요. 내 역할은 그걸 찾아내 주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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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음, 2009, 나무에 단청기법, 60x100 |
과거의 것, 옛것을 소재로 활용한다고 한국적인 색채를 갖는다고 할 수는 없다. 데미안 허스트가 청자와 족두리로 설치 작업을 했다고 그걸 한국적이라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물론 데미안 허스트가 그런 작업을 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중요한 건 서사일 것이다. 어떤 삶이 담겨 있는가,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가의 문제.
단지 소재만 본다면, 김덕용의 작품은 복고주의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단순한 복고 취향을 뛰어넘을 수 있는 건 그 속에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가 담겨 있어서다. 첫사랑, 어머니, 그리운 사람들, 눅진한 기억들. 그건 김덕용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랑과 슬픔, 상처와 연민은 모든 인간이 공유하는 정서가 아닌가. 그는 우리가 추억이라 부르는 것들을 지금 여기로 불러낸다. 그 조우를 통해 과거는 현재성을 얻는다. 나무가 자신이 살아낸 시간을 나뭇결이라는 흔적으로 남겼듯이 우리 역시 그러하리라.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다. 시간의 결이 되어 영원한 흔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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