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장은 500번, 로마서 전권도 20번 이상 써
박형만, 그가 ‘글씨 그림’이라 일컫는 성경 필사 작업은 그리스도에게 바치는 일종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 십여 년 전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그는 구원에 대한 확신을 얻었는데 그건 퍽이나 가슴 벅찬 일대 ‘사건’이었다. 그 감동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찾은 방법이 성경 필사였다.
필사, 자아와 만나러 가는 길
속도 경쟁의 시대에 필사만큼 비효율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온갖 디지털 기기를 통해 속전속결이 가능해진 세상. 하지만 디지털이 과연 축복이기만 한 걸까. 이 질문에 그는 부정적이다. 그는 아날로그 속에 답이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요즘 사람들은 아날로그의 맛을 몰라요. 디지털의 감각적인 표피에서 부유하다가 핵심은 놓치고 사는 게 현대인의 초상이죠. 일신은 다소 편해졌을지 몰라도 사람들의 정서는 예전보다 훨씬 건조해졌어요. 아날로그식 접근이야말로 사고의 깊이와 폭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죠.”
컴퓨터 키보드를 이용하는 필사는 그저 ‘기능’에 불과하다. 타이핑 숙련도에 따라 시간이 더 걸리느냐 덜 걸리느냐의 문제일 뿐. 굳이 장점을 따지자면 손가락의 경쾌한 움직임을 리드미컬하게 즐기는 정도? 그러나 손으로 직접 기록하는 일은 다르다. 자신의 필체를 눈으로 확인하며 사고의 확장을 경험할 수 있다. 그래서 필사는 자아와 만나는 일이기도 하다.
새로운 장르의 탄생
박형만 작가에게 성경 필사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그는 “직접 글씨를 쓰는 가운데 말씀의 본질을 발견하고, 그것을 묵상할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돌이켜 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한편 그는 신앙인으로서만이 아니라 디자이너로서 필사에 접근한다. 성경을 단순히 옮겨 쓰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감각의 프리즘을 통해 조형적 언어로 다듬어 보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두 가지 접근 태도는 그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큰 울림을 준다. 그의 필사 작품을 감상하다 보면 (기독교를 믿지 않는데도) 어쩐지 가슴이 아리고 사무친다. 그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미적 감흥에 즐거워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참 희한한 일이다.
필사 경력(?) 12년째인 박형만 작가가 가장 애착을 느끼는 성경 말씀은 로마서이다. 그중에서도 필사 1호인 로마서 8장은 500번도 넘게 썼고, 로마서 전권도 20번 이상 썼다. 지난해부터는 원서를 읽기 위해 히브리어와 헬라어도 배우고 있다고 한다. 앞으로 로마서 전권을 100여 가지로 디자인하는 것이 그의 계획. 가장 정신이 맑은 새벽 시간에 필사 작업을 한다는 그는 필사가 정신적 수양이라고 말한다.
“어떤 의도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행간을 헤아려 보며 정신을 집중하면 잡념이 싹 사라집니다. 무념무상이라는 게 이런 경지일 테지요.”
십자가의 재구성
필사는 인내를 요구하는 만만치 않은 작업이다. 레위기만 하더라도 하루에 2~3시간씩 쓴다 치면 마치는 데 6개월이나 걸린다. 아무리 신앙심을 바탕으로 한 작업이라 하더라도 지루한 건 지루한 거다. 그 시간을 즐겁게 건너가기 위해 그는 십자가 조형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신학적인 배경을 통해 현대적으로 해석된 박형만 작가의 십자가들은 일반에게 더 다가서기 위해 문진(文鎭), 꽃병, 보석함, 책갈피 등 기능성이 추가되었다. 십자가의 용도가 그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으며 재해석된 것이다.
“주로 유성펜으로 글씨를 쓰는데 나무의 밀도가 강하면 잉크가 먹지 않고 겉돌기 때문에 목질이 무른 나무를 씁니다. 보통 미송이나 소송, 더글라스 등 침엽수 계열을 쓰죠. 메이플처럼 단단한 나무를 사용할 때는 펜 대신 레이저로 필사를 하구요.”
그에게 있어서 아름답게 사는 삶은 신앙적 실천의 처음이자 끝이다. 슬픈 자를 위로하는 삶, 힘든 자를 격려하는 삶이 바로 그가 꿈꾸는 아름다운 삶의 정체. 참으로 다행이다. 그에게는 타고난 귀한 재능이 있으니, 그것이 아름답게 사는 삶의 징검다리가 되어줄 것이다.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그의 십자가를 통해 위로를 받은 사람이 여기에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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