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노고와 철학이 묻어있는 장인의 문장 앞에 수긍의 의미로 말줄임표로 매달아
전통악기 공방 원음국악의 침묵을 깨는 소리는 언제나 공명이다
백 개의 악기를 만들어도 진가(眞價)를 드러내는 악기는 한두 대에 불과
나무는 악기 재료로 쓰이고자 5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다. 좋은 악기를 만드는 재료 중 으뜸이 나무이다. 가야금이나 거문고, 아쟁, 해금 등 전통현악기의 주재료는 오동나무(앞판)와 밤나무(뒷판)이다. 이외에는 하나의 악기에는 길 벚나무, 배나무, 호두나무, 장미목 등이 부가적으로 쓰인다.
악기목수 32년차인 강석 원음국악 대표는 “나무도 사람을 알아본다. 주인을 잘못 만나면 저 자신이 금세 초라해질 것을 나무는 미리 알아본다. 그래서 나무를 고르는 날이 다가올 때면 몸을 청결히 하고 부정한 것을 멀리한다.”고 말한다.
나무와 사람의 배려로 만들어지는 악기
악기로 탄생한 나무는 최고의 호사를 누리는 결말이라 볼 수 있다. 강 대표의 얘기를 듣고 보면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악기만큼 혹사당하는 생(生)도 드물다. 쉼 없이 안족(줄을 떠받치는 기러기발 모양의 받침대)이 왔다갔다 움직이며 몸을 괴롭히고, 명주실이 목을 옥죄는 가운데 소리(공명, 共鳴)를 토해내는 작업이 어찌 쉬운 일일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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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악기목수 32년차인 강석 원음국악 대표 |
이들의 몸과 혼을 달래는 일도 악기 만드는 목수의 몫이다. 강 대표가 풀이하는 처방을 살피면 제대로 된 숙성이 가장 먼저다. 나무를 살리고자 하는 노력은 곧 소리를 보존하는 일이다. 전통악기에서 나무와 소리를 분리해서 설명하기는 어렵다. 악기 나무는 5년 이상 시간을 눈, 비, 바람과 햇빛 가운데 제대로 된 자연건조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목수의 무릎을 베고 누울 자격을 얻는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고난 속에서 얻은 수양은 바른 언어로 결실을 맺는다.
다음으로 꼽는 것이 대패이다. 모양과 판의 두께, 건조 조직의 습성을 헤아리는 목수의 대패질은 생명력을 불어넣는 인공호흡과 같다. 속 대패질과 겉 대패질의 큰 작업을 다섯 번 이상 반복한 끝에 비로소 원형은 완성된다.
대패질 한 번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나무를 시시각각 살펴야 한다. 갓난아이를 다루는 일과 같다. 장안에 소문난 일반 목수들이 손을 들고 나가버린 이유도 이 과정을 감내하지 못해서이다. 모양은 흉내 낼 수 있어도 소리는 만들 수 없다. 만들어지는 소리는 없다. 청혼을 받아들이듯 나무의 청혼에 현이 답해야 한다. 목수는 거간꾼 노릇을 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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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 대패질과 겉 대패질의 큰 작업을 다섯 번 이상 반복한 끝에 비로소 원형은 완성된다. |
그렇다고 목수의 수고가 가볍거나 작다는 표현은 결코 아니다. 장인의 예술혼이 절정기에 다다를 때가 이때다. 끝없이 반복되는 대패질 가운데서도 온 신경을 집중해 소리의 변화를 감지해야 한다. 두드릴 때마다 울림이 바뀐다. 300번 이상의 손 과정을 거쳐야만 완성되는 악기지만 대패에서 실패한 악기는 다른 공정으로 살려내기 어렵다. 올바른 숙성 여부는 자연에 맡긴다손 치더라도, 사람의 수고를 더해 심혈을 기울여야 할 공정이 바로 대패질이다.
마지막이 명주를 고르는 과정이다. 누에에서 뽑은 원사만을 사용해야 한다. 끊어져서도 안 되고 유약함을 잃어서도 안 된다. 연주자를 만나 부드럽게 동화되어야 한다. 실은 농가에서 뽑지만 여기에도 악기 목수의 개입과 구실은 절대적이다. 줄을 만지는 작업은 소통의 과정이다. 제 어미와 탯줄로 이어져 교감을 나누는 태아와 같은 것이 이 단계의 악기이다. 악기 목수는 연주자의 연주 패턴과 음과 양을 헤아려 줄을 당기고 엮되 악기가 다치지 않도록 풀고 헤침을 반복하며 끊임없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그렇게 한 달여의 시간을 기다려 단 한대의 전통악기가 탄생한다.
밤나무이거나 오동나무이거나
이호진 씨는 원음국악에서 제작한 악기를 고집하는 가야금연주자 중 한 명이다. 명문 국악과를 나와 연주자로 있으며 학생들을 지도하는 그에게 악기는 평생을 함께할 동반자이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공방을 찾는다는 호진 씨는 “악기의 제작 전 과정을 기억하고, 또 기념하는 일이 인생의 엉킨 실타래를 푸는 단초를 제공한다.”라고 말한다.
자신과 같은 처지라 여겨지는 나무가 어떻게 아름다운 악기로 탄생하는지를 지켜보는 것이 공부인 셈. 원음국악기에서 제작한 악기를 고집하는 이유도 하나의 악기가 탄생하기까지의 자연과 사람의 수고를 알고 있기에 연주 과정 중 그 맑음의 근원을 헤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악기 목수 강석 대표와의 인연을 오동나무와 밤나무의 사이로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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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조 중인 오동나무와 밤나무 |
현침과 옆구리, 마구리에 쓰이는 고급수종인 장미목도 있건만 왜 자신을 밤나무에 비유했을까. 강석 대표의 알맞은 설명이 있은 후 호진 씨는 무릎을 쳤다. “숙성 건조를 거치는 과정 중 밤나무는 자신을 스스로 비우게 됩니다. 가벼워지는 것이죠. 필요한 것만 남기는 모두 놓아버립니다. 뒷판으로 밤나무를 대체할 만한 소재는 없습니다. 국산 밤나무를 구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앞판과 뒷판 모두 오동나무를 쓰고 말죠. 밤나무는 울림이 좋아 밝고 경쾌한 소리를 만듭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밤나무의 품성을 흠모하지 않을 수 없다. 사회에 꼭 필요한 존재이자 다른 사람과의 인연을 소중히 다루면서도 성격까지 좋은 현자(賢者)의 품성을 갖추었다.
악기에 쓰이는 밤나무를 고르는 데에는 법칙이 있다. 최대한 천천히 자란 놈을 고를 것. 웃자란 밤나무는 쉽게 갈라진다. 중국에서 들여온 밤나무가 그렇다. 기름기가 적고 건조해 조직력이 약할뿐더러 숙성 후 탁한 검은 색을 보인다. 또 습할 때면 소리가 죽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악기 소재로서는 낙제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중국에서 들여온 저가형 현악기에는 밤나무가 쓰이지 않는다. 아니 쓰지 않는 것이 아니라 쓰지 못한다는 표현이 옳다. 밤나무는 전통악기에서 오동나무와 어울려 가장 한국적인 소리를 내는 존재이다. 그래서 밤나무가 좋다면, 오동나무 격인 강석 대표와의 인연을 두고 다툼이 생기지 않을까. “그럼, 나도 밤나무 할래.” 30년차 공방 목수 학수 씨와 22년차 성병 씨가 그 자리를 탐한다.
우리 악기의 미래를 묻다
악기란 그런 존재다. 잘 키운 딸자식을 시집보내는 일. 연주자에게 건네는 순간 악기는 한 번의 연주만으로 평가받게 된다. 집안 내력이나 자식의 성품을 선보이는 상견례 날이면 그의 청력은 긴장 속에 빠져든다. 정성을 쏟지 않은 악기는 바로 드러나는 탓에 혼을 불살라야 한다는 주문은 늘 견적서처럼 따라붙는다. 그렇게 자식 같은 악기를 보내고 나면 목수는 한 움큼의 기(氣)가 빠져나가는 느낌이다.
10년 세월을 함께 한 낡은 가야금을 탄다. 조금씩 익힌 솜씨래도 초심자의 귀에는 수려한 연주솜씨로 들린다. 강 대표가 국악기 중 특별히 가야금을 아끼는 이유는 들숨을 찾아가며 깎고 다듬어 응고된 시간이 안족이 받드는 현을 타고 울림통을 자극할 때쯤 똬리를 틀고 앉은 옛 기억들이 구성진 가락이 되어 전달되기 때문이다. 회한과도 같은 쓸쓸함이 밀려들 때면 가야금도 함께 울어주었다.
“백 개의 악기를 만들어도 진가(眞價)를 드러내는 악기는 한두 대에 불과합니다. 여러 물성이 결합해 긴장관계를 이루는 탓에 자연의 힘이 서로 궁합을 이루지 못한다면 불협 화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일반인의 귀는 속일 수 있어도 전문가의 귀에는 소음에 불과합니다.” 제아무리 잘 만들어진 악기라도 청년기는 5년에 불과하다. 그만큼 많은 스트레스와 상처를 안고 사는 것이 가야금이며, 악기에 쓰인 목재이다.
강 목수가 보는 현재의 전통 국악기가 극복해야 할 과제는 음량이 서양 악기보다 부족하다는 점이다. 앰프에 물리는 전자 가야금이나 거문고도 주문생산하고 있지만 장치에 의존하기에 근원적 대안이 되지 못한다. 서양 악기의 울림이 좋은 이유는 필요에 의해 얇은 판재(5mm)를 사용하는 연유다. 오동나무는 음을 흡수하는 성질이 있다. 그렇다고 딱히 오동나무를 대체할 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설상 있다손 치더라도 수백 년에 걸쳐 이루어진 공식을 바꾸는 게 옳은 일인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이다. “국악기는 다른 빛깔의 음색을 전하는 악기입니다. 악보대로 움직이는 연주자라면 서양악기의 음량과 음폭의 변화를 즐기겠지만 심상(心象)의 전개와 듣는 이의 감정의 흐름과 운율, 주관적 해석의 폭을 두고 말한다면 우리 국악기만한 것이 없습니다. 더 깊은 울림으로 다가설 수 있다는 말이죠.”
국악이 지시하는 소리는 웰빙이다. 자연의 소리이며, 교감의 몸짓이자 이로운 생각을 담은 음악이다. 수많은 공방 중 전통 악기제작을 고집하는 공방을 몇 남지 않았다. 그래서 항상 ‘명맥’이라는 불안의 단어가 따라붙는다. 나무의 성질을 헤아려 소리를 잡아내는 작업은 단지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예술혼을 불어넣는 작업이기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연유가 된다.
“만물을 감동시키는 국악”이 처한 어려움 한 번에 날려버리겠다는 심산으로 대패질이 빨라지고 있었다. 볏겨내도, 볏겨내도 떨어지지 않는 옹이처럼 열정이라는 딱지는 강석 목수의 가슴에서 떨어지지 않을 영혼의 음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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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 목수와 이호진 가야금 연주자(오른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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