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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인의 향기 A scent of woman, 2009 / 1480×525×730mm / 레드 오크, 월넛 어릴 적 할머니가 얼레빗을 사용하시던 정겨운 기억을 디자인의 모티브로 삼았다. 전통 얼레빗 두 개의 구상적 표현을 자연스럽게 벤치의 구조로 활용해 현대적 스타일의 가구로 완성시켜내어 보는 이로 하여금 추억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도록 해 주는 작품이다. |
마법사가 요술 봉을 휘두르면 원하는 물건이 나타나듯이 아이디어가 샘솟는 축복받은 유전자를 가진 천재디자이너는 없다. 색다른 아이디어로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고 싶지만 누구나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뉴턴처럼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영감을 일깨우는 가구 디자이너의 일상
창의력이나 조형능력은 결국 평소에 갈고 닦는 과정을 거쳐서 길러지게 된다. 어느 날 혜성같이 등장한 신진 디자이너의 기발한 작품의 이면을 살펴보면 그가 그만큼 일찍이 남다른 경험을 갖거나 노력해왔음을 알게 된다. 세계적인 디자이너 카림 라시드는 다섯 살 때부터 기억하고 싶은 것을 노트에다가 메모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이것이 그의 감각적인 디자인 스케치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다채롭고 풍부한 아이디어를 소유한 디자이너가 되는 비결은 일상생활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만의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발상의 틀을 만들어서 훈련을 하면 후천적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영감을 받는 과정과 그로부터 얻어진 아이디어를 발전시켜서 실물로 구체화하는 작업과정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고유의 방법을 만들어 나가야 남들과 차별화된 디자이너로 성장할 수가 있다.
<100 Masterpieces of Furniture>라는 제목을 가진, 가구의 역사를 빛나게 해 준 디자이너 100명의 영감 백과사전을 가지고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남들이 내놓은 창의적인 아이디어 100가지를 들여다보는 것은 내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디자이너로서의 큰 방향성을 찾는데 참고는 되겠지만 본질적인 디자이너의 자질을 배양하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종류의 책들을 보면서 과거에 필자는 도리어 ”이미 저렇게 많은 아이디어들이 나왔으니 내가 이 세상에 내놓을 창의적인 아이디어는 이제 없을 거야“라는 초조감만 생겨 도전해 보기도 전에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그들과 비교하며 스스로가 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을 가졌는지 의심해 보기도 했었다.
그러나 두 달 내내 커피 수백 잔을 마셔가면서 빚어낸 순수한 나만의 아이디어에 의해 탄생한 가구가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감격스럽게 지켜본 경험이 하나씩 보태어지면서 독립적인 디자이너로서 떳떳하게 설 수 있다는 자신감을 회복해나갔다. 가장 훌륭한 스승은 외부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손으로 스케치를 하면서 그것을 실물로 완성해보는 과정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한 맥락에서 원숙한 디자이너들이 영감을 받아서 작품으로 완성해나가는 경험을 듣는 것은 디자이너의 자질을 한 단계 높이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마르지 않는 샘물, 영감자극 매개체
머릿속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을 시각적으로 표현해내는 과정이 디자인이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영감이 디자인의 출발점이 될 수도 있고 또는 클라이언트로부터 의뢰받은 디자인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당면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에 의해 영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영감을 불러내는 방법은 디자이너들마다 각양각색이다. 영감을 받는 것은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하고 감동받은 것들이 내 안에 깊숙이 내재되어 있다가 어떤 매개체에 의해 자극을 받아 끌어내어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크게 세 가지로 압축될 수 있다.
자기가 보고 자란 자연환경, 자신이 속한 사회의 전통적인 문화나 상징물 그리고 생활방식 등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실생활에서 인체와 늘 가까이에서 사용되는 가구디자인의 경우에는 이 세 가지 외에도 사람들의 일상적인 행동 또는 특별한 물건이나 도구를 사용할 때의 습관들을 유심히 관찰함으로써 영감을 받아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기능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또한, 목가구 디자이너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영감의 원천은 바로 나무이다.
많은 목가구 디자이너들은 각기 다른 색상과 결, 질감을 가지고 있는 나무에서 저마다 다른 감성을 발견하고 이를 디자인으로 표현한다. 필자의 경우는 과거부터 간직하던 추억이나 현재에 내 감성을 자극하는 매개체들로부터 영감을 받는다. 그 매개체는 자연이 될 수도 있고 전통, 혹은 생활방식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릴 적 함께 살았던 할머니께서 늘 쓰시던 일상생활용품 즉, 얼레빗과 버선, 홑이불을 시치기 위해 쓰시던 다듬잇돌 등에서 묻어나는 모든 손때 묻고 정겨운 사연들이 자연스럽게 디자인의 원천이 되었다.
열정으로 깨어나는 영감
영감이 오는 시간은 예측불가능하다. 아이디어 스케치에 몰두하는 과정 중에 그 대가로서 정직하게 얻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정작 스케치를 할 때는 깜깜무소식이었는데 스케치를 접고 막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불현듯 떠올라 그것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잠옷 바람에 다시 스케치북 앞에 앉기도 한다. 때로는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는 중에 영감의 신이 찾아오기도 한다.
한번은 약국에서 벤치에 앉아 감기약을 처방받으려고 기다리다가 생각난 아이디어를 파란색 처방전 뒷면에 스케치한 적도 있다. 이렇듯 일상 속에서 갑작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영감이다. 그 아이디어가 번개처럼 스치는 순간 짧게 온몸에 전율이 흐른다. 그 다음부터는 천국을 걷는 기분이랄까? 이 순간을 만끽하기 위해서 필자의 곁에는 늘 손에 쉽게 잡히고 가지고 다니기 편한 작은 크기의 수첩과 펜이 있다.
이렇게 어려운 진통 끝에 탄생한 모든 아이디어가 늘 훌륭한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들에게 필요한 또 다른 능력은 좋은 아이디어를 알아내는 감각이다. 학생들에게 스케치를 시켜보면 대부분 스케치를 선별하는 능력이 미약한데 이는 피드백의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평소에 스케치에 대한 의견을 나눌 때 ‘좋다, 나쁘다’ 식의 단순한 평가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설명하고 개선방안을 제시해줌으로써 남의 시각을 통해서 스케치를 선별해내는 안목을 키우는 과정이 중요하다.
전문디자이너의 경우에도 디자이너의 판단이 우선이긴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모니터링을 통해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도 귀를 기울여 기왕이면 여러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가구를 디자인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의 최고 걸작은 다음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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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트 하인 이크 / Waste cabinet in scrapwood / high gloss / 300x50x90㎝. 작가는 쓰고 버려진 나무에서 영감을 얻어 자연스럽고 오묘한 색감과 질감의 조합으로 매력을 자아내는 예술적인 가구를 재탄생시켰다. |
가구를 디자인하는 모든 과정들은 불편하고 머릿속에 몇 달째 계속되는 편두통과 같은 골칫거리 일 수 도 있지만 이러한 스트레스야 말로 삶의 팽팽한 긴장감을 주면서 디자이너로서 스스로의 생명력을 연장시키는 버팀목이 될 수 있다.
“내 인생의 최고 걸작은 다음 작품”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늘 설레는 기대감으로 일상 속에서 영감을 불러내자! 디자인하자! 20대, 30대의 톡톡 튀는 젊은 스타디자이너들이 넘쳐나는 요즈음에도 굴하지 않고 유럽의 많은 디자이너들이 80세, 90세가 될 때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는 북유럽가구디자이너 중 핀 율이나 한스 베그너는 일생에 걸쳐 몇 백 개의 가구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고통스러운 과정으로 생각하지 않고 하나의 즐거운 게임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가능했을 거라고 필자는 감히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노련함이 묻어나는 얼굴에 젊은이의 신선한 표정이 공존하는 복합적이면서도 평온한 분위기를 띨 수 있었던 게 아닌가 생각한다.
글 · 사진 정은미
정은미 | 상명대학교 공예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후 이탈리아 밀라노 DOMUS ACADEMY 대학원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다. 한국으로 돌아와 신일 스킨스 공업주식회사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대학교 강의도 시작하였다. 네 번의 개인전을 선보였고 이제까지의 여정과 에피소드들을 에세이 형식으로 엮은 〈목조형가구 여행기〉를 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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