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아티스트 브루노 발포트...창백한 우리 젊은 날

김수정 기자 / 기사승인 : 2025-01-29 18:2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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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조각가 브루노 발포트는 작은 끌을 밀어 청춘의 한 순간을 포착한다. 창백한 얼굴들은 아름답고 또 힘겨웠던 우리의 젊은 날을 닮아있다.

 

“아, 인생은 슬퍼라. 최고의 대목이 제일 처음 오고 최악의 대목이 맨 끝에 오는 구나.” <톰 소여의 모험>을 쓴 작가 마크 트웨인은 탄식했다. 과연 그런지도 모른다. 가장 아름다운 유년기에는 너무 어려서 그 행복을 미처 알지 못하고, 이제 인생을 알만하다 싶은 때가 오면 우리는 늙고 지친 노인이 된다. 늙음을 모르기에 젊음의 소중함을 알지 못했던 우리는 과거를 추억하며 늙어간다. 그 또한 안타까웠던 걸까. 조각가 브루노 발포트(Bruno Walpoth)는 들고양이처럼 빠르게 지나가는 청춘의 한 때를 나무 위에 새긴다.

무책색으로 기억되는 날을 위해




살아 있다 문득 굳어버린 듯, 창백한 얼굴들은 우리 곁의 완벽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청년들과 아이들이다. 그는 황금의 비례를 욕심내기보다 이들이 가진 젊음을 극도로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집중한다. 그 작업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건 젊은 모델이다. 발렌티나, 이삭, 줄리아라는 작품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그는 실제 인물을 세워놓고 조각을 한다. 모델은 이웃집에 사는 소녀일 때도 있고, 자신의 아이들일 때도 있다. 거리를 걷다가 마음에 드는 모델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부끄러움이 많은 조각가는 그들에게 모델이 되기를 청해본 일이 없다.


모델을 구하고 나면 포즈를 취하게 한다. 모델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는 포즈가 나오면 그대로 동작을 멈추게 하고 플라스티신(공작용 유토)으로 3분의 1 크기의 축소 모형을 빚는다. 그때부터는 모델 없이 축소모형을 보면서 나무를 깎아 나간다. 주로 쓰는 나무는 칼을 잘 받는 라임나무지만 피부가 검은 모델인 경우 호두나무를 쓰기도 한다. 사실적인 느낌을 중시하기 때문에 작품은 늘 모델과 동일한 크기로 만들어진다. 대강의 형태가 잡히면 다시 모델을 불러들여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처럼 작업을 마무리한다.

 

 


한 가지 독특한 점은 채색을 한다는 점이다. 나무만으로는 모델의 눈동자와 머리카락, 피부의 빛깔을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극도로 섬세하게 이루어지는 조각 작업과 달리 채색은 속이 반쯤 비치는 반투명 안료로 거칠고 투박하게 이루어진다. 나무 고유의 결과 느낌을 남기기 위한 의도다. 그렇게 만들어진 조각들은 젊고 아름다운 한 때를 담고 있지만 어쩐지 서늘하고 쓸쓸한 느낌을 풍긴다.


“내 작품들이 때로 쓸쓸한 감정을 일으킨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내 조각은 사람들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아요. 나 또한 작업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가 없죠. 그 쓸쓸한 느낌은 결국 감상자의 내면에 자리한 젊은 시절을 대하는 감정과 느낌 아닐까요.”

매일의 작업을 믿는 조각가



어떤 평론가는 그의 조각을 두고 “전통 목조각 기술에 현대적인 감각이 결합된 작품”이라 평한다. 르네상스 때부터 이어진 정교한 조각 기술을 바탕으로 현대 미술이 갖춰야 할 미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모던한 감각이 작가의 타고난 예술적 감수성에 의한 것이라면 이를 표현하는 기초가 된 목조각 기술은 조각가에게 있어 축복과도 같았던 그의 성장사와 관련이 있다.

 


1959년 이탈리아 브레사노네(Bressanone)에서 태어난 브루노 발포트는 발 가르데나(Val Gardena)라는 곳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이 지역은 수세기 전부터 가톨릭 성당에서 쓰이는 정교한 목조각들과 장인들이 만든 나무인형으로 유명한 도시였다. 그의 조상들 중에서는 조각가가 많았고, 그의 할아버지와 삼촌 또한 조각을 했다. 조각가로서 자신의 운명을 의심하지 않았던 브루노는 14살에 목조각 공방의 견습생으로 들어가 5년의 수련 기간을 보낸다. 이후 독일 뮌헨 예술 대학(Munich’s Akademie der bildenden Kuenste)에 진학한 브루노는 6년 간 새로운 조형 언어를 탐색하며 정교한 목조각 기술과 모던한 감성이 결합된 지금의 독특한 조각 스타일을 정립한다. 이후 크고 작은 부침이 있었지만 조각가로서 40년 동안 삶은 흔들리지 않았다.


1973년 조각에 입문한 이래 생의 대부분을 나무를 조각하며 보낸 브루노 발포트. 그에게 위대한 예술가의 조건에 대해 물었다. “위대한 아티스트요? 그건 시대에 달렸다고 봅니다. 시대마다 좋은 아티스트를 정의하는 기준은 다르니까요. 하지만 어느 시대였든 끈기 있게 노력하는 예술가가 위대한 예술가가 됐습니다. 순간의 영감과 재능을 믿기보다 매일의 작업을 믿습니다.”


조각이 숨 쉬는 것처럼 당연했고, 지금도 숨 쉬는 것처럼 조각하는 브루노 발포트. 그는 위대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다.

 

사진 Bruno Walpoth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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