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라그러피 아티스트 줄리 벤더...뜨거움으로 그린 지극한 사랑

김수정 기자 / 기사승인 : 2024-11-12 18:0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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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 벤더는 뜨거운 인두로 그림을 그린다. 세피아톤으로 그을린 판재 위에는 동물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아로새겨진다. 뜨거움으로 마음을 그리는 화가, 줄리 벤더다.

 

미국 콜로라도의 주도(州都)인 덴버에서 50마일 떨어져 있는 곳에 러브랜드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영화 ‘브로크백마운틴’의 배경이 된 울창한 로키산맥이 병풍처럼 둘러서 있고, 16마일에 걸친 긴 산책로가 펼쳐져 있어 미국에서도 살기 좋은 마을로 꼽힌다. 이 작은 마을에 야생동물을 벗하며 나무 위에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있다. 파이라그러피 아티스트 줄리 벤더(Julie Bender)다.

파이라그러피, 뜨거움으로 그리다 



파이라그러피(Pyrography)라는 용어는 조금 생소하다. 파이라그러피는 나무, 가죽, 종이 등의 재료를 뜨거운 인두로 지져 형태를 표현하는 예술로, 우리나라에서는 파이라그러피라의 한 종류인 우드버닝(Wood burning)이 잘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 파이라그러피는 이름조차 생소하지만, 서양에서는 무척 활성화 되어 있어서 작가층도 두텁고 취미로 즐기는 사람들도 많은 편이다. 줄리 벤더는 미국의 수많은 파이라그러피 아티스트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작가다. 가볍게 흩날리는 털, 거친 힘줄, 활달한 동세가 보여주는 정밀한 묘사와 절묘한 명암 표현은 파이라그러피로 할 수 있는 표현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평가를 받는다.

2012년까지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에서 일하던 그녀가 파이라그러피를 시작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었다. 2002년, 그녀가 사랑하는 반려견이 죽음을 맞은 것이다. 황색 털과 붉은 코를 가진 활발하고 친근한 사냥개였다. 함께한 9년의 시간이 무색하게 한 줌의 유해가 그녀에게 남겨졌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사랑하던 개에게 특별한 무언가를 해주고 싶었다.  

 

 


“유해를 담은 나무 상자에 개를 추억하는 마음을 담아 어떤 그림을 남기고 싶었어요. 나무 위에 그림을 그리면 금방 지워지기 때문에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게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 우드버닝을 떠올렸죠. 곧장 싸구려 우드버너를 사서 곧장 상자에 개의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어요. 깊은 슬픔 속에 시작한 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과정은 무척 즐겁더군요. 개인적으로 아주 슬픈 일이었지만, 파이라그러피를 시작하게 된 고마운 사건이기도 해요.”

작업의 첫 단계는 ‘교감하는 것’ 



그녀는 정밀한 묘사로 평가 받고 있지만, 정밀한 표현 기술은 숙련된 파이라그러피 아티스트라면 어렵지 않게 성취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그녀의 작품이 뛰어난 것은 그러한 묘사가 작품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사색의 세계로 이끄는 데 있다. 그녀가 그린 동물은 하나같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데 어떤 것들은 처연하고, 어떤 것들은 너무나 순진하며 또 어떤 것은 잠시 호흡을 멈추게 할 정도로 많은 말들을 한다. 

 

새끼 원숭이를 꼭 끌어안고 있는 어미 원숭이를 묘사한 ‘I’ve got you’를 보자. 어미 품 안에서 눈만 간신히 내놓고 세상을 바라보는 어린 원숭이의 호동그란 눈은 세상에 대한 공포와 호기심으로 빛나고, 새끼를 안은 어미 원숭이의 표정은 어린 것이 겪어야 할 세상의 모진 시련과 아픔들을 알기라도 하는 듯 애처롭다. 오래도록 바라보고 생각에 잠기게 한다.

그것은 그녀가 그들의 내면과 오래도록 대화를 나눈 결과다. 동물과의 교감을 업으로 하는 애니멀커뮤니케이터라는 직업이 있듯, 어떤 사람들은 각별히 예민한 감수성과 공감 능력을 타고나서 동물과도 교감을 나누기도 한다. 그녀가 그랬다. 야생동물을 더욱 가까이 관찰하고 싶은 마음에 콜로라도주로 이사를 올 정도로 열렬한 동물 애호가인 그녀는 자주 콜로라도의 고원과 숲을 거닐며 동물들을 관찰하고 대화를 나누곤 했다. 우리가 보는 그림은 그녀와 동물이 숲에서 나눈 내밀한 대화의 기록인 셈이다.

대화를 멈추고 가만히 느끼기를 



그렇게 숲에서 영감을 받고 돌아오면 그녀는 곧장 작업에 돌입한다. 캔버스로 주로 쓰는 것은 단풍나무다. 색이 밝고 표면이 단단해서 보다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곱게 샌딩한 단풍나무 캔버스가 준비되면 연필로 대강의 밑그림을 그린다. 밑그림이 완성되면 인두펜으로 명암과 형태를 표현하는데, 이 과정은 무척 세심한 주의와 기술이 요구된다.

인두펜의 열기와 함께 손의 압력을 섬세하게 조절해야만 원하는 농도의 명암을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그마한 작업실에 틀어박혀 꼬박 몇 주를 작업해야만 비로소 하나의 작품이 완성된다. 3밀리미터 정도의 가는 촉으로 넓은 캔버스를 꼼꼼하게 채우는 것은 그녀 말대로 “무척 인내심을 요하는” 작업이다. 이 지난한 작업을 통해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바라는 건 없어요. 그들이 내 그림을 보는 것, 그리고 그 그림을 갖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가장 큰 선물이죠. 바라는 게 있다면 내 그림을 보면서 대화를 멈추고 깊은 사색에 빠지는 거예요. 그저 가만히 느끼는 것이죠.”

줄리 벤더 Julie Bender | 미국 미주리주에서 태어났다. 1980년 미주리대를 졸업하고 2012년까지 웹과 소프트웨어 개발 회사에서 일했다. 2002년 반려견의 죽음을 계기로 파이라그라피를 시작해 지금은 전업 파이어그라피 아티스트로 생활하고 있다. 콜로라도의 고원과 숲을 다니며 자연과 야생동물을 주제로 작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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