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작가는 말수가 적었다. 질문을 던지면 송아지 같은 눈망울을 몇 번이나 끔뻑거리다 몇 마디를 꺼냈다. 말들은 짧고 단순했지만 순수하고 정직했다. 꾸밈을 모르는 솔직한 성격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는 그림들
김성희(38) 씨는 목판화를 한다. 컴퓨터와 프린팅 기술이 정점에 달한 요즘 목판화를 한다는 것은 비행기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거리를 도보로 몇 달 동안 횡단하는 것만큼이나 고된 일이다. 나이테와 옹이는 칼이 가는 길을 무던히 막고 버티어 선다. 그림 몇 장을 남기고 한 계절이 지나간다. 그렇게 그녀의 손에서 나온 그림들은 만든 이의 고생이 무색하게 천진하고 아름답다. 형태는 투박하고 색은 단조롭지만 미소를 머금고 오래도록 바라보게 되는 그림들이다.
지금은 목판화가로 살고 있지만 그녀의 이력을 돌이켜 볼 때 사뭇 자연스러운 흐름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림을 좋아하긴 했지만 그쪽으로 열정을 불태울 만큼 열의가 있지는 않았다. 그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고 싶었고, 그런 삶을 살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모범생이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점수 맞춰 들어간 대학에서 건축을 배웠고,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듯 고민 없이 직장에 들어갔다. 그렇게 조심조심 살아온 삶이, 뜻밖에도 성희 씨를 배신한다. 직장일이 끔찍할 정도로 체질에 맞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반년 만에 회사를 나와 실업자가 됐다. “인생에 제대로 뒤통수 맞은 기분”이었다. 삶이 그녀를 배신한 게 아니라 그녀가 삶을 배신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그날 중환자실에서 유학을 결심했다
그녀가 ‘제대로 살게’ 된 건 뜻밖에도 할머니의 병환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간호를 위해 처음 찾은 중환자실과 보호자 대기실의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오전에 멀쩡해 보였던 환자가 오후에 유명을 달리했고, 한 사람의 주검이 나간 자리에 또 다른 환자가 들어왔다. 죽음은 삶의 지척에 있었다.
“그날 중환자실에서 생각했어요.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게 삶인데, 정말 하고 싶은 걸 해야 되지 않겠느냐고. 그때 떠오른 게 그림이었어요. 이왕이면 동경하던 헤르만헤세가 살았던 독일에 가서 공부해보자고. 설령 학교에 못 들어가도 거기서 헤세의 삶을 느끼고 온다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게 문득, 김성희 씨는 독일에 갔다. 독일어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였지만 착실히 포트폴리오를 준비해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 입학했다. 그때 목판화를 처음 접했다. 날카로운 칼이 만들어내는 단순하면서도 투박한 선과 찍어냈을 때의 따뜻한 느낌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이내 목판화의 매력에 매료됐다. 만드는 것도 보는 것만큼이나 즐거웠다. 작업을 할 때는 점심 먹는 시간도 아까워 커피 한 잔과 호밀빵으로 때운 날도 많았다. 그렇게 졸업을 했고, 2010년 한국에 돌아왔다.
사실 불안해요
한국에서 판화가가 활동할 수 있는 영역은 넓지 않았다. 그래서 주로 동화에 들어가는 삽화 작업을 했다. 그 작업들은 그녀에게 크고 작은 상을 가져다 줬다. 2년에 걸쳐 작업했던 <신기한 목탁소리>는 제1회 나미콩쿠르에서 그랑프리를 받았고, 이탈리아 잔니 로다리 30주기 기념상 같은 굵직한 대회에도 이름을 올렸다. 작품이 인정받고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지만, 한편으로 그녀에게 굴레이기도 하다.
“한국에 돌아와 동화책 작업을 하면서 저는 ‘일러스트레이터’로 규정 됐어요. 내 생각과는 상관없이 상업예술가가 된 거죠. 한국에서는 상업미술과 순수미술에 대한 구분이 엄격해서 상업예술가로 규정되면 전시 기회를 얻기가 힘들게 돼요. 둘을 구분하는 건 의미가 없을뿐더러 명백히 구분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쉬운 일이죠.”
예술가는 소통에 대한 욕구가 유달리 강한 사람들이다. 그녀는 그림으로 세상에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의뢰 받은 작업’이 아니라 ‘하고 싶은 작업’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담아내고, 그 이야기들로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은 것이 김성희 씨의 바람이다. 생활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상황에서 아직은 요원한 일이다.
“이렇게 살고는 있지만 도착지에 무엇이 있을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아무 것도 없을 수도 있고, 전혀 엉뚱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르죠. 사실 불안해요. 하지만 불안과 외로움이 마음을 어지럽혀도 흔들리지 않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가보려고 해요. 지금까지 잘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믿어요.”
김성희 | 1977년 한국에서 태어났다. 한양대학교 건축공학부를 졸업하고 독일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HAW Hamburg)에서 일러스트레이션을 전공했다. 2009년 제2회 CJ그림책축제 일러스트레이션 부문 대상, 2010년 The Grammar of Figures, 2013년 제1회 나미콩쿠르 그랑프리를 수상했으며, <책나무>, <신기한 목탁소리>, <어마어마한 여덟 살의 비밀> 등의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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