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아티스트 Tom Eckert...수공구로 깎은 신기루

김수정 기자 / 기사승인 : 2025-02-25 22:5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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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공중에 떠있는 책, 그 위를 덮은 매끄럽고 촘촘한 실크 베일, 이 모든 것이 나무라면 당신은 믿겠는가.

 

 

영화 <그녀(Her)>에서 아내와 별거 후 외롭고 공허한 삶을 살고 있던 테오도르는 스스로 생각하고 느끼는 인공지능 운영체제 사만사를 만난다. 경험을 통해 진화도록 프로그래밍 된 사만사는 남자의 모든 일상을 함께 하며 인격을 형성하고, 남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는 사만사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결국 둘은 사랑에 빠진다. 아주 아름답고 자연스럽게. 영화는 이 기묘한 사랑 이야기를 통해 묻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진짜’의 의미는 무엇이냐고. 어느덧 우리는 앞과 뒤가 구분되지 않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실체와 가상이 구분되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다.


일생을 사로잡은 신기루의 이미지


 


이렇게 실체가 사라지고, 실체를 기대하지 않으며, 실체가 없이도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톰 에커트(Tom Eckert)의 조각을 본다. 돌, 책, 트럼프카드, 모자, 가방, 이를 감싼 얇고 보드라운 실크 베일. 눈앞에 펼쳐진 이미지는 마술적인 분위기를 제외하고는 그리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무라는 걸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놀라움과 당혹감에 빠지게 된다. 이 ‘의미심장한 장난’의 기원은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차를 타고 애리조나의 한 고속도로를 지나고 있었어요. 몹시 더운 여름이었죠. 나는 부모님이 운전하는 차 뒷자리에 앉아 가만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멀리 호수가 보였어요. 나는 신나서 저기 물이 있다고 소리쳤는데 어머니가 물은 없다고, 그건 신기루라고 하는 거예요. 기절할 만큼 놀랐었죠.”

 


 


그 경험은 평생에 걸쳐 톰 에커트를 사로잡는다. 그는 실재와 그것을 지각하는 우리의 감각 사이에서 어떤 것이 진실인지 궁금했고, 둘의 경계에 깊이 매혹됐다. 그는 그가 매혹 당한 그 경계에 서서 그가 품었던 질문들을 다시 사람들 앞에 내려놓는다. 질문의 목적은 어떤 게 진실인지 가려내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그저 우리는 그저 이렇게 실체의 그림자로 뒤덮인 세상에 살고 있으며, 그런 복제의 연쇄 속에 떠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고.


수공구로 깎은 미술적 환상


 

 


무엇보다 궁금한 건 제작에 대한 궁금증이다. 무언가 특별한 대답을 기대하고 던진 질문에 그는 심상한 답을 내어 놓는다.

“대개는 끌과 망치 같은 전통적인 수공구로 작업을 합니다. 전기톱이나 그라인더 같은 전동공구도 부분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기본은 끌이에요.” 대답을 듣고 나니 더 신기하기만 하다. 나무에만 빠져든 30여년은 수공구로 그러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는지 모른다.

작업에 주로 쓰이는 나무는 미국피나무(Bass wood)다. 미국피나무는 가볍고 연해 칼을 잘 받아 섬세한 표현이 용이한 목재다. 건조는 빠르지만 갈라짐과 뒤틀림이 거의 없어 미국에서는 조각용으로 즐겨 쓰인다. 특히 착색이 좋아 채색이 반드시 동반되는 그의 작품에 단골처럼 쓰이고 있다.  

 

 

 


채색은 수성래커를 쓴다. 스프레이건과 크고 작은 브러쉬를 사용해 꼼꼼히 색을 입히면 나무는 본래의 물성을 잃고 흡사 도자기나 실크 같은 광택과 질감을 얻게 된다. 한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나무의 물성을 철저히 숨길 요량이라면 굳이 나무라는 재료를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굳이 나무를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다른 재료로 작업을 해보기도 했어요. 한때는 플라스틱이 조각의 미래가 될 거라고 생각했죠. 아크릴, 유리섬유, 스틸렌, 라미네이트 등 다양한 재료들로 실험을 했어요. 하지만 결국 나무로 돌아오게 됐죠. 독성 때문이었죠. 하지만 무엇보다 나무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건, 어떤 재료보다 만드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에요.”

깎고 채색하는 작업은 작품의 콘셉트나 아이디어를 구상하는 작업에 비하면 훨씬 수월한 편이다. 그는 이 시간을 ‘극도의 고통(Agony)’이라고 표현했다. 조각을 할 때 온전히 거기 집중하는 것처럼, 작업을 구상할 때에도 끊임없이 집중하고 드로잉 한다. 이 얄궂은 시간은 하루 만에 끝나기도 하지만 때로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그는 사람들에게 당부한다. 작품을 볼 때 기교에 집중하기보다는 거기 들어간 의미에 더 집중해달라고.

이 실험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는 올해로 73세가 됐다. 은퇴할 나이에 그는 작업실과 강의실을 오가며 작업을 하고 학생들을 만난다. 조각가로서 인생의 꿈은 거의 이룬 셈이지만 그래도 남은 바람이 있다면 학교를 떠나 온종일 작업실에 머물며 작업에 전념하는 것이다. 수십 년 전 그의 눈앞에 나타난 신기루는 그의 미래에 대한 암시였을까. 소년은 오늘도 신기루를 깎는다.


 

 


톰 에커트(Tom Eckert) | 1942년 미국 시카고에서 태어났다. 애리조나 주립대학과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서 순수미술을 전공했다. 80년대 이후 현실과 지각의 경계를 주제로 마술적인 느낌의 극사실주의 목조각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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