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팔레트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때 물감을 짜고 섞는 그 팔레트가 아니다. 이름이 같고 스펠링이 같을 뿐 그렇게 낭만적인 도구일 리가 없다. 지게차로 물건을 실어 나를 때 짐을 최대한 많이 옮기고 최대한 보호하기 위해 사용하는 나무 받침대다. 즉 화물 운반대를 뜻한다. 국가별로 규격과 기준이 좀 다른데, 유럽 전역에서 쓰이는 ‘유로 팔레트(Euro Pallet)’는 보통 1200×800×144mm의 사이즈를 유지한다. 크기는 일정하지만 모양은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재료가 대중없기 때문이다. 값이 쌀수록 경쟁력을 얻으니 굳이 비싼 재료를 쓸 필요가 없어서 그렇다. 국내로 치자면 과일박스나 생선 박스를 만들 때 쓰는 값싼 나무가 주재료가 된다. 대개 소나무 같은 전형적인 소프트우드를 쓰고, 가끔은 폐목이나 재활용 나무가 자신의 수명을 거기서 다 한다.
발에 차이는 흔한 나무
1960년대 철로를 통한 유럽의 운반 산업이 본격화되면서부터 폭발적으로 수요가 늘기 시작한 유로 팔레트는 지금까지도 유효한 가치를 지닌다. 유러피언은 어딜 가나 이걸 본다. 이케아를 비롯한 각종 공장과 창고, 코스트코 같은 대형 마트는 유로 팔레트 없이 돌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발에 차일만큼 이 값싸고 흔한 도구가 뜬금없이 한 회사로 들어왔다. 그것도 창의를 경쟁해야 마땅할 특정 회사로 상당량이 들어왔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광고 에이전시 브랜드 베이스(Brandbase, 1996~)의 본사 사무실이 리노베이션을 이룬 방식이다. 유로 팔레트를 규칙적으로 배치해 테이블과 계단을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자유롭게 쌓아 올려 구조물을 만드는 것으로 인테리어 효과를 줬다. 동원된 팔레트는 총 270여 개였다.
인테리어 시공을 맡은 건축사 사무소 모스트 아키텍처(MOST Architecture)가 270개의 값싼 유로 팔레트를 무려 광고 회사 사무실로 들여온 데는 마땅한 이유가 있다. 대부분의 경우가 그렇듯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접수하고 가능한 범위 내에서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의뢰인은 일단 돈을 적게 쓰기를 원했다. 좋은 광고를 만들려면 계속해서 생각을 바꿔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주기적으로 사무실 환경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주 바꾸려면 예산 부담이 만만치 않으니 변화의 시기가 찾아오면 조금이라도 아껴야 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거긴 네덜란드의 전형적인 커널 하우스(Dutch canal house)다. 운하를 마주 보는 위치에서 쉽게 발견되는 건축 양식이다. 밖에서 봤을 때는 가로 폭이 좁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현관을 기준으로 약 30m의 깊이를 가지고 있다. 지상으로부터 일곱에서 아홉 걸음 높은 곳에서 1층의 현관이 시작되고, 뒤뜰은 그보다 낮다. 건물 앞뒤의 높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미 높은 데다 사고가 발생하면 더 위로 올라가 머무를 수 있도록 설계된 이 같은 양식은 운하의 범람을 대비한 사고 관리 시스템의 일환이다. 19세기부터 지금까지 유지될 만큼 안전에 있어서는 충분히 검증을 이뤘지만, 상대적으로 인테리어 응용의 폭이 좁아 실내 건축가들을 종종 곤란하게 만든다. 모스트 아키텍처는 그 제한된 환경 안에서 요란한 공사를 진행하는 대신 값싼 팔레트를 떠올렸고 그걸 넉넉하게 들여오는 길을 택했다.
흔한 소재를 다르게 보기
완공된 사무실의 풍경은 멋지다 이전에 실용적이고 기발하다는 인상을 준다. 새로울 것 없는 도구가 자신의 쓰임새를 새롭게 주장하는 것만 같다. 이 같은 발상에 회사도 만족을 표했고, 재미있는 홍보가 될 거라 생각해 페이스북을 통해 사무실이 새롭게 변화하는 과정을 계속해서 중계해 상당한 반응을 얻어냈다. 시공을 의뢰한 광고기업 브랜드 베이스가 생각하기에, 모스트 아키텍처가 진행한 이 팔레트 프로젝트는 광고와 같다고 봤기 때문이다. 좋은 아이디어는 돈을 많이 쓴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같은 사물을 다른 시야로 관찰하는 일로 시작된다. 그리하여 색다른 관점으로 세상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일이다. 광고와 건축 모두가 영원히 고민해야 마땅할 즐거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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