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는 공예계, 공예가에게 관계대명사, 지시대명사, 목적격 대명사이고, 주체이면서 객체다.
20주년을 맞은 <2025 공예트렌드페어>는 그간 질적, 양적 성장을 거듭해왔다. 어느새 신진공예가에게는 등용문이자 자기 실험의 기회로, 공방에는 시장의 흐름과 브랜딩의 역할로, 매개관은 공예의 정수를 제고하는 축제로 자리매김했다.

해마다 페어는 부침을 거듭하며서 친애하는 평가와 박한 질책이 교차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올해 공트페의 큰 특징은 주제관이 사라지고 더넥스트와 더마스트관이 대신했고, 미술갤러리가 지시대명사로 진입했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인 즉슨, 공예가들에게 미술시장으로의 진입과 경쟁력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얼핏 타당하고 설득력 있게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 몇 가지 문젯점이 도사리고 있다. 우선 시장적 측면으로는 주체가 어느 쪽인가이다. 이미 무료대관으로 상업갤러리를 유치한 것에서 주체가 어딘가는 분명하고, 공예는 그들의 시선에 선택 받아야 하는 수동적 입장을 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과에 따라 일정 기간 그 역할에 기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부분은 성과가 미미했다. 이 문제는 좀 더 시간을 가지고 논의해야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깊이 우려할 지점은 다른 데 있다. 공예계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과 신분이 애매모호한 현실에서 상업 갤러리가 공예계와 공예가를 이해하고 선택하는 기준이 얼마나 정확하고 타당하겠는가다. 이는 페어 현장에서 확인된 것으로, 공예 작가의 발굴과 성장 기회를 찾기보다 갤러리 관계 작가 중심의 오브제가 더 부각된 것에서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짧은 기간에 수행하기 어렵다는 현실적 문제를 감안하더라도 최소 몇 곳은 미술계 혹은 미술 갤러리가 지향하고자 하는 예술 공예의 기준과 시점이 도드라졌어야 했다. 하지만 어느 점에서는 일방적이었고, 어느 부분에서는 몰이해였다.
공예가 공예를 정확히 바라보고 바르게 추스르는 일이 전제되지 않고서는 그 다음 단계의 진입은 장애를 만날 수밖에 없다. 그간 해온 것처럼, 전시 감독 한 사람의 역량에 당대의 공예를 기준하기에는 공예 스스로의 문제가 복잡하고 미숙함이 여전함을 부인할 수 없다.

공예는 그 특성 상, 전통과 현대, 실용과 조형이 부딪치고 화합을 거듭해야 하는 난제의 장르다. 불과 100년도 채 되지 않은, 그마저도 일제 강점기를 통해 수입된 ‘공예’라는 언어의 함축적 의미는 여전히 미완성이다. ‘손끝의 미학’이 의미하는 바가 곧바로 와닿지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갤러리 또한 이 부분에 대한 해석이 명징하지 못한 채 현실의 문제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던 점도 일부 수긍한다.
의도했던 아니던, 공예의 역할과 시장이 확대될 것이 분명하다. 디지털 세상이 주류가 될수록 원시적 감각의 갈증은 더 긴요하다는 것 외에도 그 이유는 많다. 이제 공예는 스스로 지은 옷을 입고 자기 주체성을 구가해야 한다. 스스로의 의지로 당차게 체력을 키워야 한다. 자석이 자기 중심으로 주변을 끌어당기 듯이 자구책을 세워야 한다.
굳이 석굴암 본존불상의 위엄과 위력을 소환하지 않아도 될 만큼 공예는 자기 세계관이 분명한 절대 대명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전통, 당대, 미래 공예는 그 기준에서 재구성되어야 한다. 최소한 의존명사에서 벗어나 고유명사 자리라도 지켜야 한다.
사진: kcdf instar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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