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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혜숙 작 '미인도' 시리즈. 미의 욕망과 감각을 은유한 유리작품 |
“가슴속에 서린 만 가지 사연을 붓끝으로 능히 전신했는가?” 조선의 천재 화가 신윤복이 ‘미인도’에 던진 말이다. “물질에 서린 만 가지 욕망을 흐르는 유리 물성에 감히 전신했는가?” 유리작가 최혜숙이 ‘미인도’에 내뱉는 말이다. 어느 시대든지 미(美)는 만인이 쫓는 허상의 실상이면서 마음에서부터 사물에 이르기까지 틈새 없이 피는 비물질의 꽃이다.
최혜숙의 <미인도>와 <유물> 시리즈는 아름다움의 욕망과 기호에 현대식 부장품인 명품을 입력함으로써 시대의 미를 압축하고 먼 미래를 예시하는 복합적 메타포이다. 200년 전, 신윤복이 가늘고 긴 선으로 에로틱한 사녀화(仕女畵)가 양반가의 양가적 욕망 그렸다면, 최혜숙은 소비문화의 첨단을 구가하는 물질 중심의 미를 조선 시대와 현대를 오가며 유리에 녹여냈다.
<미인도> 시리즈는 시대마다 미의 기준은 다르지만 욕망의 기준은 불변한 것으로 규정하고, 각 시대를 중첩한 풍속화를 유리 족자에 입체화했다. 부드러운 담채 바탕에 익숙한 그림과 생경한 유리 명품을 교차시킴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오늘에서 과거로, 전통에서 현대로 이끌고 있다. 조선 여인의 손목에 현대판 명품 미니 핸드백 걸고, 하이힐과 운동화를 신고 있는 장면은 어느 시대건 부유하는 욕망적인 소비의 만연함을 이중적 구조로 완성했다.
작품의 표면을 덮고 있는 유리 입자들은 미인도의 가채와 섬세한 귀밑머리, 조여진 가슴과 풍성한 치마 끝자락으로 흘러내리면서 과거와 현재를 초월하는 경이로운 세계를 표현했다. 또한 불에 녹은 유리 액체는 붓의 끝자락이 되어 입체와 평면의 미묘한 경계를 자유자재로 채색하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미인도의 주인공이 현대라는 오래된 미래에 머물지 않고 다시 100년, 200년이라는 먼 미래의 사물 시간으로 이동하는 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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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혜숙 작 '유물' 시리즈. 현대문명의 미래를 진단했다. |
<유물> 시리즈는 여인의 손에 걸린 명품 가방과 하이힐을 벗겨내어 타임캡슐에 안치하면서 새로운 서사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는 과거와 현재, 현재와 미래가 상대성 공간에서 같은 시간에 존재하는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다. 미인도에서 빠져나온 21세기의 하이힐과 핸드백 그리고 향수병과 운동화들은 유리의 물성에 숨어들어 규사의 성질로 둔갑해 천천히 분해된다. 이는 시대의 문화적 가치와 욕망의 뿌리가 사물의 시간에 의해 소각되는 현상으로 세기말적 운명을 앞서 예언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욕망의 물리적 현상은 최혜숙의 유물의 방에 갇히고 말았다. 사물의 가치와 욕망이 이룬 모든 문명은 변질되어 사라지거나, 유물로 남아 역사의 증거가 될 수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최혜숙의 유리는 투명성과 불투명성, 단단함과 부서짐의 반복을 통해 아름다움의 극치와 허상을 우아한 여인의 자태로 추상하고 있다. 이것은 욕망의 외면과 가치의 내면이 투쟁하는 한가운데 서서 시대정신을 밝히겠다는 작가의 직설적 의지이기도 하다. 조선 여인의 유희에 오늘의 명품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미인도>는 시대의 풍류를 압축하는 탁월한 기교가, <유물>에서는 시대의 욕구와 갈증을 상징하는 명품의 종말을 암시하는 작가의 세계관이 선명하게 녹아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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