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 없음"... 공예의 존재를 규명하는 법

육상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2-09-05 01: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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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 프리즈 전시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름이란 '없음'으로부터 실재성을 부여한 것으로, 원천으로부터 분별과 동시에 분쟁의 씨앗이라고 말한다.


만약 국어 사전에서 ‘공예’라는 단어를 지운다면 어떤 상황이 될까. 어떤 공예는 미술과 조각, 어떤 공예는 오브제와 디자인, 어떤 공예는 장인과 메이커 등으로 마치, 금융의 파생상품처럼 잘게 쪼개질 것이다. 전통은 박물관 유물이 될 수 있고, 예술성은 호황을 구가하는 갤러리가, 기술은 산업의 첨단 기계가 너끈히 감당해낼 것이다.  


모든 장르를 아우르면서도 정작 자기 정체성과 고유성은 스스로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 요즘 공예의 처지이다. 어떤 젊은 평론가의 지적처럼 공예가 여기저기 걸쳐 있을 바에는, 시류의 셀럽에 충실할 바에는, 스타일링을 추종할 바에는, 스스로 이름을 상실하고 '무명'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어차피 공예가도 줄어들고 있고 공예 아닌 것이 공예로 둔갑하는 처지에, 더욱이 공예라는 그 이름마저 본명도 아닌 외래어라면 괜히 '공'과 '예'의 중간에서 어정쩡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름'은 만물에서 분리된 작의적 현상이지 궁극의 몸체가 아니다. 현대 공예는 분별과 분열의 구조적 오류에서 '이름 없음'의 근원적 덩어리로 되돌아가서 모든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키아프, 프리즈의 초고가 미술품도 한때 다 같은 덩어리였음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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