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재해석... 이화동은 살아있다

전미희 기자 / 기사승인 : 2025-10-10 22: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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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마을은 계속해서 변화한다. 닮은 꼴 주택이 줄을 지은 조용한 산동네에서 서울의 관광 명소로, 그리고 살아있는 박물관으로.

 

이화동의 골목은 가파르다. 주민들 대부분이 노년층인 걸 감안하면 봄부터 겨울 걱정을 하게 된다. 비슷한 주택가 사이의 구불구불한 골목에서는 길을 잃기도 쉽다.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면 무조건 위로 좁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자. 숨이 차오를 때쯤 마을의 정점에 다다르면, 눈앞에는 남산과 북악산이 둘러싼 서울의 전경이 펼쳐진다. 풍경은 골목길을 올라온 데에 대한 보상이다.

마을 주민들은 이곳에 터를 잡은 지 50년이 넘은 이들이 대다수다. 50년 전 부모 품을 떠난 아낙이 이화마을로 시집을 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자라 또 다른 둥지를 트는 동안, 마을도 자신의 역사를 확장해 왔다. 바깥에서 보는 이는 모른다. 그 좁은 골목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움직임과 변화의 시도가 있었는지. 재개발이라는 거대한 손에 스러지지 않기 위해 마을은 끊임없이 변신하며 스스로를 지켜오고 있다.

1950년대 이화동에서는 


 


이화동 마을은 낙산성곽 안쪽에 자리 잡고 있다. 성곽을 따라 걸으면 정면에 높은 빌딩이 펼쳐진다. 오래된 일본식 가옥과 한양의 도성, 그리고 현대의 건물이 한 시야에 들어오며 좀처럼 볼 수 없는 풍경이 나타난다. 서남쪽을 바라보면 남산이 보인다. 날이 좋으면 그 오른쪽으로 인왕산까지 보인다며 마을 주민이 덧붙여 말한다.

조선의 한양은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 그리고 낙산의 보호 아래 요새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 중 낙산은 인왕산과 마주보고 있는 산이다. 산이라고 하기에는 높이가 소박하다. 125m 남짓한 이곳은 낮지만 풍경만은 일품이다. 남산과 인왕산, 북악산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은 낙산뿐일 것이다. 과거에도 지금처럼 경치를 즐기기 위해 이곳을 찾는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6.25전쟁 이후 갈 곳 잃은 이들은 서울 각지로 흩어져 자신들만의 마을을 형성했다. 1950년대 낙산 아래 마을에도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판자촌을 이루고 살았다. 그러던 것이 이승만의 거처가 이곳으로 정해지면서 불량주거지가 철거되고 새로운 주택 단지가 조성됐다. 이화동이라는 이름도 대통령의 집인 이화정을 따 왔다. 똑같이 생긴 집들이 주르륵 늘어져 있는 것도 이 당시 개발의 결과다.

대한주택영단(지금의 LH공사)이 영단주택을 공급하며 국민주택단지를 이뤘고, 주택은 일본식 적산가옥의 형태를 빌려 지하가 없는 2층 집으로 설계했다. 1층은 현관과 두 개의 방, 부엌으로, 2층은 작은 방 하나로 구성되어 있다. 화장실은 외부에 마련했다. 1층은 시멘트 벽돌로 지어 온돌이 설치되어 있고, 2층은 목조로 지은 집들이다. 가옥은 15평 규모로 아담했지만, 집마다 작은 정원과 테라스가 딸려 있는 것을 보면 지금의 타운하우스처럼 여겼으리라 추정한다.

벽화마을의 부흥, 외지인으로 몸살을 앓다


 

80년대 서울은 빠르게 도시화가 진행됐다. 그 당시 서울의 많은 달동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마을이 사라진 자리는 전혀 다른 생김새의 건물이 솟아올랐다. 개발의 바람은 이화동에 까지 미치는 듯 했다. 젊은 사람들은 하나, 둘 마을을 떠났다. 산동네를 찾는 사람의 발길은 끊기고, 마을은 점점 소외되어 갔다.


2006년, 서울시는 낙후지역의 환경 개선을 목표로 마을 살리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화동에는 70여 명의 아티스트들이 찾아와 회색빛 시멘트벽과 계단에 색을 입히고 물감을 덧칠했다. 알록달록한 무늬와 아기자기한 그림이 마을을 수놓자 어둑했던 동네의 이미지가 한결 밝아졌다. ‘낙산 프로젝트’는 개발에 밀려 잊혀 진 동네에 다시금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공공미술 프로젝트가 확산됐다. 통영의 동피랑 마을, 부산의 감천 마을 등 사람들을 떠나 보냈던 산동네에 벽화가 그려지고, 예술품이 들어서자 다시금 발길이 잦아졌다. 조용했던 마을은 벽화와 함께 관광객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이화 마을 또한 벽화 작업 후 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하면서 유명해졌다.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남녀노소, 외국인을 불문하고 동네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동네에 활기가 도는 것도 잠시, 외지들의 흔적이 조용했던 마을에 점점 드러났다. 주민들의 쉼터가 관광객들의 놀이터가 되고, 마구 눌러대는 셔터에는 마을 사람들의 삶에 대한 배려가 없었다. 주민들의 생활까지 침해됐다. 외지인이 늘어나자 불미스러운 일도 종종 생겼다.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

주민과 외지인의 연대를 꿈꾸다



최근 이화마을에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마을이 다시 한 번 도약을 시도했다. 마을 전체를 하나의 박물관으로 구성하여 방문객들이 마을이 지나온 시간과 그 시간 위에 쌓인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전시가 열린 것이다. 쇳대 박물관의 최홍규 관장이 기획한 ‘이화동 마을박물관’은 마을이 더욱 긍정적으로 변할 수 있도록 주민이 주인이 되는 마을박물관을 선보였다. 갑작스럽게 늘어난 외부 발길에 마을의 주체성과 고유의 가치가 사라지지 않도록, 한편으로는 외부 사람들이 마을을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느끼며 동네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마련된 전시다.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아티스트 및 작가들과의 협업으로 마을의 박물관과 갤러리, 공방을 활용한 전시를 만나볼 수 있다. 몇몇 전시 공간에는 마을 주민들이 안내자 역할을 하고 있다. <이화동 마을 박물관>이라는 전시관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실제로 썼던 생활도구와 사진 자료를 전시해 방문객들이 이화동 주민들의 삶을 간접적으로 경험한다. 실제 옛 가옥을 개조한 몇몇 공간도 전시관으로 쓰였다. 외지 사람들은 마을 주민들에게만 허락된 경치를 잠시 빌리기도 하며 하루 동안 이화동 주민이 된 기분을 맛보기도 한다.

  

 

 

오늘날 도시에는 마을이 사라지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생겼다. 골목은 신작로로 변하고, 달동네는 재개발로 뒤덮였다. 하나둘 언덕을 허물고, 거기 담긴 이야기까지 허문다. 주소에서 마저 동네가 아닌 도로를 떠올리게 되니 동네의 역사가 사라지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도시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동네는 그곳에서 일궈진 삶의 이야기가 무궁무진하다. 무분별한 개발 속에서 살아남은 몇몇 마을이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이화마을은 지금도 잊혀 져 가는 공간이 있음을 끊임없이 확인 시켜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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