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가 더욱 뜻깊었던 이유는 이제는 진부한 소재가 되어버린 ‘제품 수명주기 분석(한 상품 또는 서비스의 친환경성 여부를 판단하는 분석 기법으로, 제품 생산에서 폐기 단계까지 분석하여 제품의 친환경성 여부를 결정한다-역자 주)’에 대해 학생들이 진일보한 개념을 확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테마는 진부하지만 15명이 만들어낸 12개의 결과물은 결코 진부하지 않다. 한 팀은 유유히 흐르는 곡류에 적합한 보트를, 또 다른 팀은 얇은 합판을 둥글게 말아 다리로 사용하는 접이식 벤치를 선보였다. 한 학생은 보기에는 평범한 부엌용 의자이지만 버려진 목재를 천연 과일즙으로 물들인 친환경 의자를, 나머지 한 팀은 바이오 합성수지와 톱밥을 응용해 무엇이 폭발하는 듯한 형태의 의자를 만들어냈다.
사실 학생들이 흥미로운 작품을 선보인 것은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뛰어난 상상력과 밝은 비전으로 영국왕립미술대학의 선택을 받은 수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을 이끈 지도 교사들의 면모가 훌륭한 덕분이다. 본 대학 산업디자인과 교수인 토르트 본체(Tord Boontje)는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디자이너이며, 이 프로젝트의 코칭 스태프였던 세바스찬 롱(Sebastian Wrong)은 가구 회사 ‘Established & Sons’의 창립자이자 디렉터이다. 마지막으로 해리 리차드슨(Harry Richardson)은 전도유망한 디자인 회사 ‘Committee’의 공동창립자이다.
콘크리트와 철에 맞서기 위한 비책
이 프로젝트는 ‘미국 활엽수 수출 협회(American Hardwood Export Council, 이하 AHEC)’가 공동 주관한 행사이다. AHEC는 목재에 있어서 제품 수명주기 분석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그에 대한 연구를 해왔다. 그들이 주장하는 목재 사용의 중요성은 나무가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는 재생 가능한 자원이라는 데에 있다. 그러나 목재에 대한 제품 수명주기 분석 데이터가 턱없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이와 달리 철이나 콘크리트 애호가들은 이들 재료에 대한 자세한 제품 수명주기 분석 데이터를 구축해 재료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목재 산업에 종사하는 이들은 그들에 대항할 수 있는 자료를 제대로 구축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AHEC는 지속가능성 부문에 대한 서비스와 컨설팅을 제공하는 업체인 ‘PE International’에 의뢰했고, 나무 생장에서부터 벌목 및 가공, 수송에 이르기까지 각 단계가 환경에 미치는 영향의 정도를 분석하게 했다. 의외로 수송은 환경에 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으로 드러났는데, 특히 해양 수송일 경우 그 영향은 극히 적다고 한다. 다만 목재를 인공 건조하는 데 연료가 많이 들기 때문에 그로 인한 지구온난화가 우려된다. 지구온난화도 문제지만, 건조 시간이 길수록 목재의 두께가 두꺼워지는 부작용도 함께 따른다.
이는 꽤 철저한 분석이지만 수송을 거쳐 공장에 도착하는 과정을 고려하지 않았다. 이뿐만 아니라 목재의 이용 및 가공 방식, 목재와 함께 사용되는 재료, 또 목재 자체의 수명과 그 수명을 다했을 때 처리 방법을 다소 놓친 감이 있다. 그리하여 AHEC는 학생들로 하여금 목제품 수명주기 분석과 관련한 다양한 이슈를 고려한 디자인을 선보이도록 요구했다.
미션, 세 가지 조건을 완수하라
AHEC가 학생들에게 던진 조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가구의 수명이 다하면 소각할 수 있도록 디자인 할 것, 둘째 사용될 목재의 양과 버려질 목재의 양, 목재 외 사용될 재료의 양을 정확하게 계산할 것, 셋째 어떤 종류의 기계를 몇 대 사용할지 결정할 것. 사전에 제출한 일종의 ‘디자인 견적서’는 수치로 환산되었고, 이 수치는 가구의 수명을 결정했다.
학생들은 이 모든 요구 조건을 수용했지만 디자인을 최우선으로 삼았다. 이 프로젝트는 각자가 지닌 디자인적 관점을 직접 실현한다는 데 의의가 있었기 때문에, 우수한 디자인 혹은 뛰어난 친환경성을 두고 벌이는 대회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가구 특성상 각기 다른 디자인과 기능을 지닐 수밖에 없는 스툴과 보트를 비교해서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개중에는 월등한 제품 수명주기를 과시하는 작품들도 있었다. 가 선보인 12개 작품 모두는 뛰어난 디자인과 친환경성, 실용성을 두루 갖춘 ‘개념 있는’ 가구라 할 수 있겠다.
▮ Michael Warren_ bar stool
마이클 워렌은 날씬하고 가벼운 재료를 사용해 전체적으로 날렵한 형태의 스툴을 완성했다. 스팀 벤딩(steam bending)으로 인한 에너지 소모를 피하기 위해 함께 붙어 있는 두 개의 집성재를 이용했다. 많은 양의 목재를 사용하지 않고도 튼튼한 스툴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보기에 약해보이는 스툴이 완성되었다. 하지만 최장 수명 2년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관리가 철저할 경우 수명이 더 늘어날 수 있다는 희망도 얻었다.
다른 디자이너와 마찬가지로 워렌도 가구 제조사 ‘벤치마크(Benchmark)’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 동안 스툴 제작에 임했다. 벤치마크에서 일하는 숙련된 가구 장인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으면서 그들의 기술을 익힐 수 있는 기회였고, 그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목재가 허비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 Petter Thörne_ Beeench
페테르 쏜의 ‘벤-치(Beeench)’는 이름 그대로 아주 긴 벤치이다. 박물관에 전시될 수 있도록 길이를3.5m로 맞췄지만, 공간적인 제한이 없었다면 그보다 더 길게 만들 수도 있었다. 목재의 긴 널을 이용해 다리를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가볍고 이동성이 좋은 벤치를 완성했다. 이 벤치는 굉장히 흥미로우면서 디자인적으로 깨어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쏜이 기대한 만큼의 경제적인 재료를 사용했다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한 목재에서 긴 널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양의 목재가 낭비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작품을 만들면서 한 제품을 생산하는 행위가 어떤 식으로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깨달을 수 있었다.
▮ Nicholas Gardner & David Horan_ Phyllida bench
디자이너 듀오 니콜라스 가드너와 데이빗 호란도 쏜과 마찬가지로 ‘Phyllida bench’라는 이동식 가구를 만들었는데, 쏜과 달리 튤립우드 원목을 그대로 사용해 경제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두께 1.5mm의 얇은 합판을 둥글게 말아 상판 밑 링 모양으로 파인 홈에 끼우면 다리가 된다. 어떻게 저 얇은 합판이 다리가 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지만 직접 벤치에 앉아보면 그 생각은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 James Shaw & Marjan van Aubel_ well proven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이 낭비를 줄이려고 애썼지만 제임스 쇼와 마르얀 반 아우벨은 낭비된 목재를 의도적으로 재료로 사용했다. 두 사람은 목재를 가공하는 다양한 작업에서 나오는 톱밥과 바이오 합성수지, 염료를 섞어 완전히 새로운 구성을 보여주었다. 기존 폴리프로필렌 의자를 거푸집 삼아 톱밥 반죽을 찍어낸 뒤 애쉬 다리를 집어넣었다. 앉는 부분은 표면을 부드럽게 처리하되 뒷면은 거칠다 못해 혼란스러운 표면이 되도록 했다.
▮ Norie Matsumoto_ Folding Chair
앞서 살펴본 실험적인 작품과 달리 노리에 마츠모토는 우아한 ‘Folding Chair’를 디자인했다. 애쉬와 월넛이 이루는 비대칭 디자인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집 안에 놓고 오래도록 감상하고 싶은 우아한 가구인 만큼 긴 수명을 자랑한다. 최대한 낭비를 줄일 수 있도록 사각 형태를 그대로 살린 사려 깊은 디자인이다. 곧 상품으로 출시될 이 의자의 예상 수명은 60~80년이다.
▮ Lauren Davies_ Leftovers Chair
로렌 데이비스의 의자 ‘Leftovers Chair’는 튼튼해 보인다. 요리를 좋아하는 로렌은 천연 과일즙으로 채색을 해 의자 자체가 요리 메타포가 되도록 했다. 네 다리는 토치 램프로 ‘익혔고’, 상판은 식초에 ‘절였다’. 너무나 독특하지만 바쁘게 돌아가는 부엌에서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의자다.
사진 Petr Krecji, Mark O'Flaher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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