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가의 결핍을 찾는 과정
눈(目)은 ‘보이는 것’에 종속되는 몸의 도구이다. 어떤 사태를 파악하기 위해 주어진 상황에 제한적 역할을 수행하는 수행기관이다. 어쩌다 그것으로 어떤 사물이나 풍경에 대해 심상적 주관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상황 혹은 사물을 보는 것에서 벗어나 읽어내려고 하는 걸까? 그 이유는 보여지는 단서에서 2차적 해석을 통해 자신만의 잠재적 창고에 기록하려는, 다시 말해 보는 것을 창작 혹은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대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 때문이다.
그렇다면 본다는 것의 본질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것을 ‘실존(實存)’이라 말하고 그것이 역설적으로 ‘사실’이라는 이름으로 매듭지어지는 아이러니, 바로 그것이다.
그냥 보이는 시시함에 만족할 수 없는 욕망의 전차를, 성윤모 사진이 꿈(夢)과 환영(幻影)이라는 이름의 종착역으로 우리를 몰이하고 있다.
한마리 작은 새가 되어 하늘로 오른 작가는 속세의 잡다한 사물을 제거한 후 상상과 착각의 혼돈에 몰입해 색(色)의 이미지네이션을 구축한다. 먼 바다에서 서서히 밀려오는 파도의 상투는 서서히 산이 되어 육지의 내면에 자리했다가, 다시 깊고 푸른 밤이 되어 심해로 돌아가 거친 호흡을 가다듬는다. 이런 반복적 행위를 수만 번 되새김질하던 중 어느새 그 푸르름은 늙은 어미의 몸처럼 닳고 닳아 붉은 노을이 되어 생의 여정을 멈춘다.
사진가 성윤모가 전제한 꿈(夢)과 환영(幻影)은 결국 실체 없는 실체를 좇아가는 나르시시즘이다. 또는 무중력이 개입한 허무주의일 수도 있다. 그는 카메라에 눈을 고정하는 순간부터, 따분하고 노곤한 일상의 리얼리티에서의 도피를 시작한다. 스스로 최면을 걸어 구름 편린에, 푸르름에, 붉음에 몸을 투사하고 풍경과 합일을 이룬 후 전설에 몸을 맡기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그의 사진을 좋다, 그렇지 않다. 라는 입담은 무의미하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듯, 자신의 결핍을 채워가는 일련의 행위에 그의 사진이 있고 그것을 통해 상대를 이해하고 다시 자신을 이해하려는 과정이 이번 사진전의 의미다.
작가의 세계관 앞에 사진은 작은 도구일 뿐이다. 번득이고 잘 생긴 그의 사진 너머에 숨어 있는 한 사진가의 목마름을 이해하려 할 때, 색조 화장 같은 푸름과 붉음의 이미지는 여행길에서 우연히 만나는 누구나의 풍경이 아니라 오로지 사진가 성윤모의 어제와 내일의 실존으로 대체된다.
이번 사진전에서 성윤모가 전제한 몽(夢)과 환영(幻影)은 완전한 자의식에 다다르기도 전에 현실에 의해 부서질 수도 있다. 하지만 부단히 그의 작업은 계속될 것이고 언젠가는 몽환이 현실이 되고 현실이 몽환이 되는, 그래서 수시로 두 세계를 쉬이 교차할 수 있을 때에 이르러서야 그의 사진은 ‘완전’하다고 말 할 수 있다.
사진전 <보이는 것으로부터의 도피, Dreams & Phantasms>는 결국, 자아를 완성하고자 하는 한 사진가의 몽환의 랩소디가 잔잔히 흐르는 여운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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