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청을 지나면 한적한 마을이 나타난다. 도촌천을 따라 조용하게 자리한 일산 민마루 마을은 따스한 봄 햇살로 반짝인다. 평화로운 마을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동네 산자락 아래 옹기종기 모여 있는 예쁜 주택들을 볼 수 있다. 제법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제일 높은 곳에 오르니 단순하면서 절제된 디자인의 2층짜리 목조주택이 서 있다. 2층 창문으로 진호·진경 쌍둥이 형제가 빼꼼히 고개를 내민다.
그 모습이 귀여워 서둘러 만나러 가려고 하는데 주택의 구조가 좀 특이하다. 주차장 옆으로 난 계단을 올라야 1층과 만난다. 그리고 그 1층 앞엔 널찍하게 데크가 깔려 있다. 가파른 경사지를 깎아 평지로 만든 게 아니라 산의 경사를 활용해 주차장을 만들고 그 윗부분에 자연스럽게 마련된 넓은 공간을 앞마당처럼 만들었다. 자연을 방해하지 않고 원래 그곳에 있었던 것 같은 어울림으로 말이다.
데크 위에 자유롭게 주차(?)되어 있는 알록달록한 색의 장난감 말과 자동차가 개구쟁이들이 살고 있음을 넌지시 알린다. 외장으로 두른 적삼목은 역시나 산에 있으니 더욱 빛을 발한다. 집 주변의 봄을 알리며 파릇파릇하게 돋아나는 나무와 수줍은 핑크빛 진달래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과 같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자작나무 합판으로 만든 계단을 온 몸으로 내려오며 쌍둥이 형제가 손님들을 맞는다. 27개월 된 진호·진경에게 계단은 놀이터이자 운동장이다. 스스로 조심하는 방법을, 일상에서 놀 수 있는 아이디어를 터득하며 아이들은 자라고 있었다.
1층에는 넓은 데크를 지나 숲의 나무들, 그리고 민마루 마을의 풍경까지 한 눈에 보이는 통창이 나있다. 북동향이라 어두울 수 있지만 다양한 크기의 창들은 집 안 깊숙이 햇살을 끌어들인다. 주로 손님을 맞고 일을 하는 이곳은 작업실과 회의실을 겸하고 있다. 가구의 배치로 공간을 구별해 사용하다가 최근에 자작나무 합판으로 파티션을 만들어 설치했다. 직접 디자인해 오크로 짜 맞춘 테이블에서 관계자들과 회의를 할 때에는 작업실의 복잡한 풍경을 가릴 수 있고 탁 트인 풍광을 보며 작업을 하고 싶을 땐 넓은 공간으로 연출이 가능하다.
오픈 스페이스, 주택의 새로운 형태와 삶을 가능하게 하다
건축가와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 부부에게 집은 일터이면서 쉼터인 셈이다. “원래 자유롭게 일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물론 회사 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회사에 얽매인 삶이 아니라 가족들과 소중한 시간을 나누면서 일도 하는 식으로요. 집에서 사무실을 겸해 일하면서 현재 아내도 프리랜서로 일을 하고 있고 쌍둥이 아이들도 어리니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무척 많아서 좋아요.” 남편 이중재 씨의 말이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과 공간이 많은 삶을 염두에 두고 설계했으니 당연히 집은 가족을 최대한 배려해 지어졌다. 멋지고 예쁜 집도 좋지만 무엇보다 집이란 가족 모두에게 가장 안락하고 평온한 휴식처여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를 새삼 깨닫는 과정이었다. 자신이 직접 살 집을 설계하고 짓고 인테리어 디자인을 하면서 부부는 직접 건축주와 의뢰자의 입장이 되어보면서 일적인 측면에서도 새로운 경험이었다고 한다.
이제 가족만을 위해 꾸며진 2층을 구경할 차례다. 어떻게 알았는지 또 다시 온 몸으로 계단을 오르며 진호·진경 형제가 손을 잡아 이끈다. 계단을 오르자마자 만나는 거주 공간은 카페 같은 집을 꾸미고 싶었다는 부부의 콘셉트가 명확하게 느껴진다. 1층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방을 없애고 오픈 스페이스로 꾸민 2층은 미송 루바로 두른 높은 천장 덕분에 실제의 26평보다 더 넓어 보인다.
트인 공간으로 인해 어수선해 보일 수 있는 문제점을 아내 최성미 씨는 단순히 다양한 가구의 배치만으로도 훌륭히 서재와 거실로의 안정된 구분을 가능하게 했다. 여러 매체에서 실용적인 팁과 함께 모던하고 세련된 감각을 선보여온 인테리어 스타일리스트로서의 실력이 집안 곳곳에 잘 배어난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부터 늘 살고 싶은 집에 대해 이야기했었어요. 답답하지 않고 살림의 무거움이 묻어나오지 않으면서도 심플하고 여유로운 카페라는 콘셉트를 살리고 싶었죠. 하지만 많은 분들이 카페 같은 인테리어를 꾸미고 싶어 하지만 살림살이라는 게 그리 만만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저는 가리는 수납과 보여주는 수납을 적절히 활용했어요. 무조건 가리는 게 아니라 예쁜 살림살이 소품들을 보여줌으로써 오픈 스페이스에 맞게 수납과 인테리어를 모두 충족시킬 수 있었죠.”
이런 아이디어는 창틀도 놓치지 않았다. 채광을 위해 다양한 크기로 많은 창을 냈기에 창틀마다 튼튼한 오크로 선반을 만들었다. 책을 꽂아놓기도 하고 여행을 다니며 모은 아이템들을 올려놓으니 창은 또 다른 수납공간이자 인테리어 프레임이 된다.
그 여자, 그 남자 이제 집을 그리다
집은 언젠가 카페가 될지 모른다. 진호·진경이 자라면서는 키즈 카페가 될 수도 있고 아이들이 다 자란 후에는 인테리어와 건축과 관련한 책이 많으니 북 카페가 될 수도 있다. 흔히 집은 한 번 결정되면 그 형태와 구조에 삶이 종속되어 수동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집은 생명력이 느껴진다. 언제 어떤 형태로의 변화가 가능하도록 공간을 비웠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원래 나무와 자연을 좋아하는 부부의 취향에 맞게 집은 원목들로 많은 부분 꾸며져 있다. 포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기 위해 원목을 많이 사용했지만 다소 지루할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특성에 맞게 다른 원목을 사용했다. 무거운 디자인 책을 꽂아야 하는 책장과 오래 사용해야 하는 식탁은 1등급 목재인 티크로 짜 맞췄고 창틀은 오크 특유의 색감으로 차분한 감성을 살렸다. 외장재에 쓰인 적삼목의 남은 부분도 공간 박스를 만들거나 모서리에 맞게 짜 넣어 책꽂이로 활용했다.
나무는 하얀색 벽과도, 인더스트리얼한 느낌을 살리는 철제 아일랜드 식탁과도, 신혼여행 때 시장에서 발견해 정성스레 여행 가방에 챙겨온 빈티지한 소품들과도 잘 어울린다. 그 매력을 잘 알고 있는 부부의 손길로 숲 속 위의 집에선 나무가 자라고 있다.
“집을 지을 당시 쌍둥이를 임신한 만삭의 몸이라 현장에 나와 보진 못했지만 제가 원하고 그렸던 모습 그대로의 집이 만들어졌어요. 저는 다른 건축주들보다 더 좋은 건축가를 만난 셈이죠. 제 마음을 모두 헤아려주고 이해해주었으니까요. 오히려 남편은 힘들었을지도 몰라요. 다른 건축주들보다 더 까다롭고 어려운 상대였을 테니 말이에요(웃음).”
남편은 건축가로서 큰 틀과 구조를 생각해 밖을 책임지고 아내는 인테리어 디자이너로서 꼼꼼하고 디테일하게 안을 책임진다. 이들의 집을 보고 만들어달라는 사람들이 늘어 <집을 그리다>란 이름으로 부부가 함께 집 짓는 일도 시작했다. 결혼한 지 3년 만에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쌍둥이 형제와 아름다운 집을 얻은 이중재·최성미 부부는 그렇게 오늘도 집을 그리고 있다.
※ 이 기사는 10년 전 지면에 기고된 것으로 현재의 시점에서도 정직하고 아름다운 주택이어서 온라인에 재기고하는 것임을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www.drawinghom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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