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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관우, 2024 Condensation 응집, 0025, 71x71, Mixed media(Korean Stamps) on Panel |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시작하는 것이 중요하고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창작 현실에 적용해 보면, 시작이라는 말을 주제로 대신해도 좋다. 창작에 관한 한 주제가 반이다. 그만큼 주제가 결정적이라는 말이다. 주제가 서면 형식도 서고, 주제가 누우면 형식도 따라 눕는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이처럼 주제를 세우는 일이 생각만큼 쉽지만은 않다. 평소 축적된 인문학적 배경과 문제의식이, 그리고 여기에 남다른 감성이 전제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이관우 작가는 어떤 주제를 어떻게 세울 수 있었는지 볼 일이다. 언젠가 작가는 사람이 살지 않는 빈집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와 파편들 가운데서 도장 몇 개를 찾아냈다. 작가가 왜 빈집을 방문했는지, 하필이면 도장이 눈에 들어왔는지 모를 일이지만, 추측해보면 막연한, 절실한, 어쩌면 그 자체 내적 필연성이라고 해도 좋을, 알 수 없는 이끌림으로 빈집을 찾았을 것이고, 도장을 보는 순간 바로 이거다 싶었을 것이다. 심화하고 확장해도 좋을, 평생 함께해도 좋을 주제를 찾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도장은 빈집과 함께 버려졌지만, 빈집이 처음부터 빈집은 아니었듯 도장 역시 주인이 있었다. 빈집이 부재로서 존재를 증명하듯 도장은 부재 하는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고, 한때 존재했었을 누군가를 증언하고 있었다(잠재적으로 우리는 모두 한때 존재했었던 존재들이고, 존재한 적이 있었음을 추억하는 존재들이다). 바로 예술과 관련해서 가장 결정적인 주제라고 해도 좋을 정체성 문제와 도장이 결부되는 지점을 발견한 것이다. 정체성의 표상으로서의 도장의 가능성을 발견했다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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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관우, 2023 Condensation 응집, 001, 113.5x146.5, Mixed media(Korean Stamps) on Panel |
도장은 정체성 문제와 결부된다고 했다. 도장이 정체성의 표상이라고도 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지 볼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그런 만큼 사회는 개개인의 삶을 대리하고 관리하는, 감독하고 감시하기 위한 사회적 장치(권력 장치라고 해도 좋을)를 운영하고 있다. 사회적 구성원의 신분을 보장(보증)하는 생체정보(대표적인 경우로 지문과 목소리, 그리고 눈동자와 같은)를 관리하고 있고, 사회적 신분증(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 그리고 여권과 같은)을 운영하고 있고, 그리고 여기에 최근에 새로이 등장한 전자정보 시스템이 있다. 심리적인 무정부주의자도 없지 않겠지만, 보기에 따라서 현대인은 이처럼 통제사회와 관리사회라는 숨 막히는 현실을 살고 있다. 그것도 반쯤은 자발적인, 그리고 무감각한, 그래서 오히려 정체성 문제가 더 절실한 현실로 다가오는 현실을, 역설적이고 양가적인 현실을 살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 정체성과 개별적 정체성이 만나는 지점에 도장의 지정학적 위치가 있다.
도장은 사회적 계약에 따른 것이고, 사회적 약속에 의한 것이다. 이러한 사회적 약속에 따르자면, 도장은 나를 대리한다. 사회적 주체를 대리하고, 사회적 신분을 대리한다. 그러므로 도장이 곧 나 자신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했고, 도장은 사회적 주체를 대리한다고 했다. 무슨 말인가. 인간은 관계적 동물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작가의 작업에는 도장이, 그리고 직인이 빼곡하다. 여기서 도장(그리고 직인) 하나하나는 개별 주체를 표상하고, 빼곡한 도장은 개별 주체들 간 관계를 의미하고, 그 관계망이 이루는 사회를 표상한다. 그렇게 작가의 작업에서 도장은 개별 주체의 정체성을 표상하고, 사회적 정체성을 표상한다. 개별 주체 간 관계를 표상하고, 사회적 관계망을 표상한다.
작가의 작업에서 주목되는 부분으로 치자면, 이처럼 도장이라는 의외의 소재와 도장으로 표상되는 정체성 문제라는 주제 의식도 있지만, 방법적인 측면에서도 작가만의 남다른 형식을 열어놓고 있다. 작가의 작업은 도장을 소재로 한 것이라고 했다. 그렇다고 도장 자체를 직접 오브제로 도입하지는 않는다. 수지 성분의 주형으로 찍어낸 도장(그러므로 일종의 유사 도장이라고 해도 좋을)을 캔버스에 빼곡하게 심은 것이다. 이로써 평면도 아니고 입체도 아닌, 평면과 입체를 하나로 아우르면서 넘어서는, 회화도 아니고 조각도 아닌, 회화와 조각을 하나로 아우르면서 넘어서는, 굳이 말하자면 입체의 요철을 가지고 있는 평면이 저부조의 형식을 견지하고 있는, 그런, 경계 위의 작업이며 조형의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다. 여기에 판각(전각)의 형식을 도입한 것이나 탁본의 가능성마저 잠재하고 있는 것으로 치자면 회화적 평면과 조각적 입체를 넘어 판화마저 하나로 아우르는 일종의 종합적인 작업이 예시되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기왕의 장르와 범주를 넘어서는 형식적 시도와 성취가 있다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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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관우, 2026 Condensation 응집, 001, 74x92, Mixed media(Korean Stamps) on Panel |
처음에 작가는 도장으로 시작해 이후 점차 직인으로 나아간다. 덩달아 형태 역시 원형에서 시작해 점차 사각형이 주를 이루는 형식적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그렇게 빼곡한 도장이 부감법으로 내려다본 도시 풍경처럼도 보이고, 항공지도처럼도 보이고, 우주처럼도 보인다. 구조로 치자면 모자이크처럼도 보이고 모듈처럼도 보인다. 하나의 단위원소(모나드)가 반복 배열되면서 패턴을 만드는 경우를 모듈 구조라고 한다. 그러나 작가의 경우에는 하나의 단위원소에 해당하는 도장의 형태와 꼴이 제각각이다. 얼핏 유사해 보이지만 같은 도장은 하나도 없다. 사람들이 비슷해 보이지만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같으면서 다른 도장이 어우러져 만든 패턴(질 들뢰즈라면 차이를 생성하는 반복이라고 했을)이 비정형 모듈 구조를 예시해주고 있다.
여기서 작가가 일관되게 제시하고 있는 응집이라는 주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하나로 모은다는 의미일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이질적인 것들, 다른 것들, 차이 나는 것들을 하나로 모아 쌓는다는 아상블라주를 의미할 것이다. 이질적인 것들, 다른 것들, 차이 나는 것들을 단위원소로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브리콜라주를 의미하기도 할 것이다. 내용으로는 이질적인, 다른, 차이 나는 사람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사는 세상을 의미할 것이다. 우연하고 무분별한 집합(부분과 전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보여주는 총체와는 다른)으로 나타난 삶의 질을, 삶의 양태를 의미할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와 집합(관계가 집합을 매개하는)이야말로 작가의 주요 방법론이며 문법이라고 해도 좋다.
관계라고 했다. 작가의 작업은 도장으로 표상되는 사람 간 관계를 예시해주고 있고, 요새 말로 치자면 소셜네트워크를 예시해주고 있다. 관계의 망으로 치자면 이런 사회적 관계망을 넘어 불교에서의 인드라망을 예시하는 부분도 있다. 나와 너는, 존재와 존재는 서로 반영하고 반영되는, 유리구슬로 된 인연의 망으로 밑도 끝도 없이 연결돼 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반영하고 반영되는 인연의 망이 우주적 비전을 열어놓는다. 우리는 아득한, 막막한, 가장자리가 없는, 그러므로 어쩌면 그 자체 무한을 위한 메타포라고 해도 좋을, 우주를 떠도는, 어쩌면 우주에서 길을 잃었다고 해도 좋을 별들이며, 소우주들이다.
도장으로 빼곡한 작가의 작업은 그렇게 인연의 망으로 연결된 우주를 떠도는 존재의 섬들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우리는 모두 보다 큰 세계에 속한 일부라는, 알 수 없는 세계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일즉다 다즉일, 곧 하나가 전체고 전부가 하나라는, 그렇게 내가 우주와 하나로 연결돼 있다는 사실을 예시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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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관우, 2026 Condensation 응집, 61x61, Mixed media(Korean Stamps) on Panel |
그렇게 마치 가까운 옛날 활판인쇄를 연상시키는, 빼곡한 도장들 위로 작가는 도자기와 같은, 막사발과 같은, 호리병과 같은, 찻잔과 같은, 탑과 같은, 기와집과 같은 전통적인 모티브를, 자동차와 같은 현대적이고 일상적인 모티브를, 명상에 잠긴 부처의 두상과 같은, 제의에서나 볼 법한 머리가 셋 달린 촛대와 같은 종교적인 모티브를, 사람의 초상과 같은 존재론적인 모티브를, 그리고 여기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같은, 박수근의 나목과 같은 차용된 모티브를 마치 희미한 기억처럼 흐릿한, 그러므로 잠재적인 실루엣 형태로 덧그려놓고 있었다.
멀게는 고대의 암각화에서부터 유산으로 물려받은 전통의 소환과 함께, 원전을 해석해 재사용하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었다. 때로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에 대한 화답처럼 사각형 속의 사각형을 연상시키는, 내면으로 난 문을 연상시키는, 보이는 것을 넘어 보이지 않는 세계를 향해 열린 통로를 떠올리게 만드는, 그런, 사각형의 실루엣 형태를 그려놓고 있었다. 그렇게 아마도 일상의 넓이와 삶의 깊이를, 의식의 질과 양을 함축해놓고 있었다.
글: 고충환(Kho Chunghwan 미술평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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