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공간 <0914 도산 플래그십 스토어>... 명품의 길, 나무의 공간

육상수 칼럼니스트 / 기사승인 : 2026-07-28 12: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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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가 한 여인을 운명처럼 다시 만난 그날의 시간성과 유년의 감성이었던 바다라는 공간성을 테마로 그려낸 곳, 플래그십 ‘0914’에 20년 후의 미래가 열리고 있었다.

먼 바다에서 바라 본 어촌은 언제나 현실을 망각하게 하는 감성의 공간이다. 언덕을 향해 포개지듯 중첩된 단출한 집들은 좁은 유선의 골목길에서 겨우 누군가의 집으로 분리돼 보인다. 해질녘의 포구는 미안하리만치 쓸쓸한 풍경이지만 작은 집들의 창에서 넘어오는 불빛은 선장 김씨, 마을이장 박씨, 횟집 구씨, 초등학교 최 선생님, 인천댁, 강화댁 등이 오늘도 무사함을 알려준다.

청담동에서 명품 바다를 만나다 



핸드백 플래그십 0914의 인테리어는 엉뚱하게도 어촌의 풍경을 불러들였다. 그 먼저 와서 기다린 것은 원목들이다. 공간 콘셉트 발상의 주인은 세계적인 핸드백 ODM 회사 시몬느 박은관 회장이고 그것을 실행한 사람은 건축집단 Ma의 유병안 건축가다. 이 두 사람의 궁합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나무를 많이 쓴 상업 공간이라는 건축 이력을 남겼다.

박 회장이 연애시절 아내를 부르던 이름 ‘시몬느’를 회사 이름으로, 0914는 32년 전 총각시설 그 아내를 사무치게 그리워하다 극적으로 다시 만난 1984년 9월 14일을 기념해서 지은 브랜드에 박 회장의 바다 감성을 물씬 불어 넣어 완성한 공간이다. 건축주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철학과 감성을 실사구시로 공간에 표현하는 일은 생각처럼 간단하지 않다. 그것도 20년 후 세계 최고의 럭셔리 핸드백 브랜드가 목표로 하는 공간이다. 폴로, 랄프 로렌, 캘빈클라인, 셀린느, 지방시, LVMN, 버버리, 코치, DKNY, 마이클 코어스, 마크 제이 콥스, 토리버치 같은 쟁쟁한 해외 명품 브랜드 가방을 만들어온 시몬느의 미래전략 기지가 될 브랜드 공간 0914는 어떤 누가 디자인을 맡더라도 고민스럽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연의 공간을 부유하다 



그런 공간의 완성을 맛보는 일은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도산공원 입구에서 100미터도 채 안 되는 곳에서 만난 0914는 다섯 채의 바닷가 집들이 언덕에 세워져 있다.

1층은 모던하고 간결하면서 부유하다. 먼저 이로코 원목으로 헤링본 장식을 한 마루가 손님을 맞는다. 중앙 홀에는 길이 3m의 통원목이 시간의 부침을 알리듯 심재와 변재 모두 갈라진 채 여유롭게 누워 사위의 기운을 지탱해주고 있다. 프론트 앞은 비욘세, 주드로 등 해외 셀럽들이 사랑하는 브랜드로 잘 알려져 있는 허드슨 퍼니처(Hudson Furniture)의 가구로 채웠다. 허드슨 특유의 다리 디자인이 돋보이는 테이블에 악어가죽과 뱀피를 올리고 비슷한 소재의 가방을 함께 진열하는 등 나무와 가죽을 조화를 이뤘다. 정면에서 본 벽에는 LED 조명을 삽입한 원목 받침대가 기능과 디자인을 동시에 표현해 색다른 느낌을 전한다.



선박 내부로 통하는 듯한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지하 1층 남성 매장이 나온다. 천정과 바닥은 나무로, 벽은 벽돌로 마감했는데 전면 유리를 통해 시야를 확장 시켰다. 내부는 철제 문, 수압계, 조명이 걸려있는 갈고리, 폐선이 된 작은 거룻배 한 척이 수리를 기다리고 있다. 마침 0914의 물고기 로고가 찍힌 제품들과 어우러져 남자만의 바다 감성이 바닥에 흐르고 있다.

오픈된 2층의 난간에는 해풍을 견뎌온 너와 지붕을 한 나무집이 매달려 있다. 충만해진 호기심으로 서둘러 계단을 오르면 먼저 수분을 상실한 나이테 피부가 석화되어 벽을 장식하고 있다. 건물의 메인 공간인 2층 은 바닷가 마을의 분위기를 한껏 돋우는데, 고재와 고벽돌, 돌 파편이 먼 항해에서 돌아 온 선박을 연상케 한다. 오랫동안 숙성된 와인과 오크로 만든 와인통, 낡은 가죽 가방 등 ‘오래될수록 좋은 것’들로 채워진 것으로 보아, 더 먼 항해를 위한 자신감의 표현으로 느껴졌다. 마치 브랜드 0914가 20년 후를 위한 프로젝트인 것처럼.  

 


와이너리를 지나면 Hunter's cabin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공간을 만나게 되는데 벽면과 천정, 바닥까지 모두 나무로 마감하고, 심지어 공간 내부에서 엘리베이터와 화장실로 향하는 외벽까지도 고재로 이어진다. 거기에 벽난로와 헌팅 트로피, 속을 파낸 통원목 테이블 등 다양한 오브제들은 공간의 디테일을 나타낸다.

2층의 마지막 공간은 폐가다. 뜯다만 벽면에 뚫린 창문과 얼룩진 바닥, 무자비하게 쌓여있는 돌들로 다른 공간과 차별을 두었다. 0914를 통틀어 가장 ‘쎈’ 공간이다. 하지만 한쪽 벽면 전체를 거울로 채워 밝고 넓어 보이도록 하고, 흰 원목 테이블을 가운데 두어 전체적인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1층과 2층에만 네 개의 통원목 테이블이 있는데 가공 방법이 모두 다르다. 1층은 절단면을 그을림을 주고 윗면은 갈아내서 최대한 자연 그대로의 모양을 유지했고, 2층 Hunter's cabin 공간에 있던 한 쌍의 테이블은 원목의 가운데를 파서 유리를 덧댔다. 그리고 2층 마지막 공간의 테이블은 원목에 흰색으로 칠했다가 닦아내기를 여러 차례 반복해 완성했다. 인테리어를 맡은 건축집단 Ma가 이 공간을 일관되게 표방한 ‘핸드 메이드’ 콘셉트가 있었기에 식구들이 현장에서 직접 파내고 갈아내었고, 그랬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3층으로 올라가면 기능에 초점을 맞춘 사무실이 나온다. 내부 회의와 외부 미팅을 진행하는 프레젠테이션 룸은 1층 쇼룸과 2층의 Hunter's cabin을 합친 공간이다. 프로젝터를 장착한 테이블을 중심으로 한쪽은 새롭게 출시될 가방을 함께 점검할 수 있도록 미니 쇼룸을 만들었고. 다른 한 쪽은 출시된 가방을 보관할 수 있는 창고로 활용했다.

4층 팬트하우스는 박은관 회장의 사적 공간으로 집무와 접견용으로 쓰인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1,2층 보다는 차분하고 3층 사무실보다는 콘셉츄얼하다. 정원의 벽에는 조환 작가의 철판산수화가 소나무를 대신하고 있다. 이곳 또한 벽과 천장을 고재로 마감했고 가구의 대부분은 박 회장이 오래 전에 준비해 둔 것들로 채웠다. 4층에서 이어진 옥상에는 야외 회합용으로 준비된 두툼한 멀바우 슬랩우드가 태양과 마주하고 있다. 이 나무도 언젠가는 실내의 고재처럼 잿빛으로 변할 것이고 그때쯤이면 0914 브랜드의 진면목도 드러날 것이다.

겹치고 포개진 길을 따라 지하에 이르다 



지하 1층을 내려가면 먼저 까페 ‘Passi 0914’를 만난다. 화려한 조명과 원목 테이블이 잘 어우러져 감성과 함께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이곳에서 좁고 긴 계단으로 이어진 지하 2층으로 내려가면 0914의 브랜드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가죽 공방 ‘Leather Spa’가 자리하고 있다. 통창을 통해 0914의 장인들이 직접 가방을 만드는 모습을 볼 수 있는 오픈 공방으로, 가죽 종류와 컬러, 일부 기능을 변경하는 주문 제작이 이루어지고 타 브랜드의 가방 수선도 가능하다. 맞은편에는 가방이 수선 되는 동안 고객들이 쉴 수 있는 라운지룸이 마련되어 있다.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공간이라 대충할 법도 하지만, 이 건물에 ‘대충’은 없다. 나무의 뿌리를 그대로 살린 테이블과 나무로 프레임을 만든 소파, 오브제 하나하나까지 심혈을 기울였다.

한 층 더, 깊고 좁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면 어망이 매달린 외벽을 거쳐 갤러리에 이른다. 최근까지는 한국의 젊은 현대미술 작가들을 섭외해 가방을 주제로 매번 새로운 테마의 회화, 설치, 사진, 디자인, 영상, 퍼포먼스 작업을 선보이는 <백스테이지展>의 작품들을 전시했고, 다음은 박 회장의 소장품으로 전시를 구성할 예정이다. 여기까지가 일반에 공개된 공간이다.

모든 길은 나무로 통하다 


 

 

 

전체 공간에 엄청난 양의 나무가 사용되었으니 일정 부분은 무늬목을 사용했을 법도 한데, 단 한 군데도 무늬목은 없다. 전라도의 어느 학교에서 쓰던 고재에서부터 직접 발품을 팔아 모은 다양한 종류의 원목을 재가공이나 오브제로 변화시키려는 노력들이 곳곳에 묻어난다. 물론 비용이나 재료적 한계 때문에 타협점을 찾은 부분도 없지 않다.

나무를 쓰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어떤 것은 너무 크고, 어떤 것은 너무 무겁고, 어떤 것은 너무 쉽게 뒤틀렸다. 변수의 반복이 거듭됐지만 그럼에도 원목을 고집한 건, 사람이 드나드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건축집단MA 유병안 대표는 “건축의 실행은 공학이지만 해법은 인문학이다. 결국은 사람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침실을 만든다고 하면, ‘어디에서 잘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하는 거다. 콩크리트 위에서 잘 수는 없지 않나. 차갑고 해로우니까. 이런 식으로 생각하다 보면 나무를 쓸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전 작업에도 나무를 많이 활용했고, 이 공간 역시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라며 나무에 대한 소신을 덧붙였다.

유 대표는 다음 건축에서는 ‘중첩’을 화두로 풀어가겠다고 했다. 산수화의 풍만한 상상력과 여유를 말하는 것인지 되묻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중첩되어 세상을 이루었 듯이 중첩된 건축은 분명 사람의 사는 형편을 이롭게 하기 위함일 것이다. 강원도 대관령 자락에 지을 작은 나무 집이 그것, 중첩의 완숙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상업 공간에 0914에서 중첩의 본질을 호되게 경험했으니 말이다.

바다 0914, 여행을 마치며


 

 

 

새로운 곳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건 습관이다. 똑바로 가면 될 것을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길을 잃는 거다. 그때마다 시간이 걸리고 돌아가지만 길을 잃지 않았더라면 보지 못했을 것들을 마주하게 된다. 이곳에서도 여러 번 길을 잃었다. 그 덕에 이 공간의 입구가 세 개라는 것과 화장실 문에 남녀 구분은 핸드백과 서류 가방으로 표시한다는 것, 0914의 영문명이 ‘Zero-nine-one-four'가 아니라 Gonguilsa'라는 것 같은 사소한 사실도 알게 됐다.


0914는 브랜드 제품을 보여주고 판매하는 공간이 아니라 한 사람의 철학과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와 미래의 이상을 재현한 곳이었다. 당신이 도산 공원 앞을 걷다가 청담동의 바닷가 마을을 발견한다면 그냥 가방만 사서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골목길을 걷듯 기웃거리다가 한번쯤 길을 잃어버리기를 소망 해 본다. 마치 숲에서 세상의 출구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사진: 건축집단 MA, 우드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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