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회嘉會, 그 즐겁고 아름다운 만남... 한옥이 조화로운 ‘가회동성당’

유재형 기자 / 기사승인 : 2025-03-17 10:3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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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나 와도 좋소.” 이 집의 콘셉트를 정의하기에 이보다 적당한 말은 없다. 가회동성당은 누구에게나 열린 집이다. 그러려고 작정하고 지은 집이다

 



성당은 하느님의 집인 동시에 그 백성이 공동체를 이루는 곳이기 게 이유다. 이곳을 설계한 오퍼스건축사사무소의 우대성 건축사는 관리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누구에게나 개방된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에 합의된 공공의 건축을 표방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문턱을 낮추고 북촌과 조화로운 양식을 만들었다. 짓고 나서 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은 한옥 성당이 현대인의 눈높이를 맞췄다.


부피를 자랑하지 않는 종교건축



 


도성 안 서울의 옛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동네 중 하나인 가회동은, 요사이 전통이 흥한 곳이다. 이곳에 이르러 우리 것이 가진 매력에 빠져드는 이유, 새삼 전통이라는 것이 쉽게 접할 수 없는 유산이 되어간다는 아쉬움 때문이리라.

가회동성당은 북촌 언덕을 걸어 내려온 선비의 도포자락처럼 처마선을 부드럽게 치켜세우고 있었다. 이 세련된 전통양식은 어느 건물보다 앞서 손님을 맞이한다. 건물 보다 마당을 먼저배치하고 마당 주위로 한옥과 성전, 사제관이 보인다. 도로변에는 단층 한옥이 먼저 서고 덩치 큰 성전은 뒤로 물러섰다. 이곳이 역사문화미관지구라는 특수성을 충실히 반영한 결과다. 애써 그럴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지만 송차선 주임신부는 주변과 친화하는 성당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도로에서 보면 이곳이 가회동성당이라는 표식이 없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만큼 주변 환경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갖추고 있다. 저 혼자 우뚝 서고자 한 종교건축물이 결코 아니다.


 

 


우선 가회동성당이 가진 역사적 의미를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즐겁고 아름다운 모임’의 뜻인 마을 가회동은 한국 천주교 역사의 발원지이다. 천주학을 배우고자 원하는 이들이 자발적인 모임을 가졌다. 하지만 이 어울림은 박해로 인한 피의 순교를 낳기도 했다. 모진 탄압 중에도 1795년 첫 미사는 올려졌고, 이후 황실이 참여하는 예배당으로 발돋움했다. 고종 황제의 다섯 번째 아들인 의친왕도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 제대를 마련하고 공식적인 건축물을 마련한 해는 1949년이다. 당시 성당이 한옥이었다. 송 신부는 한옥 건축물 재현은 역사적 의미 아래서 마땅히 치러야할 임무라 여겼다.

가회동성당은 한옥이 들어선 마당을 기점으로 한옥과 서양식 본당이 공존하고 있다. 이 중심 마당은 천주교 순례길(2코스)의 시작점이 된다. 집체가 어우러지며 수많은 골목길을 내는 북촌의 집처럼 이곳 한옥의 화방벽도 가로와 경내를 구분하는 경계가 된다.  

 

 

 


한옥은 전통방식 그대로 건축되었다. 장안에 소문난 목수는 죄다 수소문해 천주교 역사에 남을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만들겠다는 것이 건축위원회의 생각이었다. 공 들여 모신 이가 이근복 중요무형문화재 번와장, 대한민국 명장인 임동조 석장, 중요무형문화재이수자 정태도 대목장, 철물을 전담할 박문열 중용무형문화재 두석장이다. 여기에 로하스한옥의 대표 이연성 목수가 총괄 지휘를 맞았다. 그러나 시키고 말 것도 없었다고 한다. 밥을 대는 식당 여 주인의 증언처럼 “한옥 짓는 목수들이라 그런지 좋은 인품이 가득하더라.”는 고백이 건축에 참여한 장인들의 품성을 말해주고 있다.

이연성 대표는 <우드플래닛>이 지난 8월호에 소개한 가평 생명의빛 예배당의 목재가공 파트를 맡아 참여한 이력이 있다. 건축공학과 출신인 그는 졸업 이후 실무를 익히고자 건축사사무소를 찾는 보통의 과정을 거부한 채 2002년 처음 한옥 짓는 현장에 뛰어들었다. 중요무형문화재 대목장 전수장학생을 거쳐 2005년 문화재수리기술자(보수921)로 거듭났다. 용인 법륜사 대웅전 건립, 환구단 정문 이전 복원 등 굵직굵직한 현장을 경험한 그이지만 못내 아쉬움이 있었다. 제대로 된 집 한 채 올리는 일. 이 대표는 가회동에 이르러 마흔 전에 이루고 싶은 소망 하나를 이루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그렇게 시작된 공사는 한옥부와 양옥부를 나누어 동시에 시작되었다. 서로의 간섭이 문제였다. 송 신부가 공모에 붙여 제안한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은 선비와 벽안의 외국인 사제가 어깨동무하는 형상’이 만들어낸 거리는 불과 30cm에 지나지 않았다. 자칫 시빗거리를 남길 수 있는 간격은 조금씩 내어주고 밀어주면서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현대 한옥의 진화
 

 

 

 


한옥 내부로 들어서면 ‘오늘의 한옥’이 왜 현대 건축인가를 알 수 있다. 전통적 개념에서 집은 우주의 중심이다. 산과 물은 물론이고 태양의 방향까지 집을 중심으로 계산되고 실제로 운행하기 때문이다. 채와 마당이 어우러져 세계관을 이루는 양식 위에 번거로운 과정이 보태졌다. 전통한옥이라고 해서 촛불 켜고 요강 들이고 살일은 아니었다.

전기선, 수도파이프, 도시가스관, 스프링클러, 인터넷선, 에어컨 배관 등 문명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담아내야 한다. 여기에 조명기구까지 들여놓고 보면 재목의 입장에서 여간 번잡스러운 것이 아니다. 간결한 목재 선과 면을 즐기기에 이것들은 분명 방해물이다. 뒤로 빼고 숨기고 하다 보니 목수의 수고가 배로 늘어난다.

가회동성당 한옥은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계산하고 조율했기에 보와 도리가 선보이는 전통미는 오롯이 살아 있다. 자연 속에 집 한채를 짓는 개념을 넘어 주변 환경이 주는 온갖 도전을 받아들이고 어우러지는 과정을 감내하고 것이 지금의 한옥이다. 그래서 오늘의 한옥은 전통의 양식이면서도 현대 건축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안채에 들어 앉아 바깥을 보면 잘 생긴 배롱나무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원래 전통적 건축 개념에서는 음양의 조화를 고려해 마당을 비우는 것이 일반적이다. 좋은 양기가 오래 머물도록 마당은 미워두는 개념이기에 수목을 심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두 개의 상충된 건축양식이 들어서는 곳이기에 이를 중재할 일종의 거간꾼이 필요했다. 배롱나무 한그루가 한옥과 양식 건물 사이에서 흥정하며 서로의 입장을 충실히 중재하고 있다.

건축 의도처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은 좋으나 자칫 지상 3층 규모의 본당 성전에 비해 단층 한옥이 초라해 보이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설계를 맡은 오퍼스는 독립적인 공간을 마련하고 이 공간을 터 전면에 내세우는 것으로 조율했다. 또 한옥과 근거리에 있는 화강암 외벽은 목재로 감싸 한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했다.  

 

 

 

 

 

송차선 신부는 “집은 기능성과 예술성 위에 인문학적 깊이가 더해진 후에야 좋은 집을 탄생한다.”고 설명했다. 가치의 건축을 지향하고자 신도들을 설득하고 서울대교구를 찾아 후원을 요청할 때도 가회동성당이 지닌 역사와 종교적 의미를 충분히 설명했다.


그 귀한이름 ‘국산 소나무’


 

 


송 신부는 한옥 건축에 쓰이는 목재는 반드시 국산 소나무여야 한다고 고집했다. 미루어 짐작하면, 한국 천주교의 태동이 외국인에 의한 선교가 아니라 이곳에서 자발적으로 이루어진 연유가 아닐까. 어찌되었던 목수들 사회에서는 ‘삼대가 적선을 해야 좋은 집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복을 쌓아야 좋은 나무를 만나고 좋은 인연이어야 뛰어난 목수를 만난다는 의미다. 가회동성당은 “삼대를 거쳐 이룩한 화복이 이렇게 훌륭한 건축물을 빚어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건축 현장이라는 것이 인연을 못 만나면 일이 자꾸만 꼬이기 마련이다. 사람도, 나무도, 동네도 복을 쌓았기에 이곳 가회동성당에 응축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로하스한옥의 이연성 목수는 좋은 소나무를 찾아오라는 주임신부의 요청을 받아들이고 삼 개월을 찾아 헤맨 끝에 200-300년산 소나무를 찾아냈다. 강원도 인제와 양양에서 들어온 결이 곧은 소나무였다. “나무를 찾은 뒤 텐트를 치고 이곳을 지켰습니다. 혹 누군가 공사장에 들어와 불이라도 피우면 화재가 날까봐 염려해서죠.”  

 

 


송 신부가 쏟은 정성과 열정을 나타내는 일화다. 은총이 아니었더라면 얻을 수 없고, 인연이 아니었더라면 만날 수 없을 좋은 재목이었다. 국산 소나무는 송진이 풍부해 마를 때 자작자작 갈라지는 구열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적당히 갈라지고 터진 후에는 천년을 버티는 목재로 손색이 없다. 안채 기둥에서는 여전히 송진이 흘러내리고 있다. 그 진원지를 찾아 시선을 옮기면 기둥을 세우고 창방과 보아지를 짜 맞추고 주두를 얹은 모습이 드러난다. 아름답지만 견고하고 또 빈틈이 없다. 노숙을 감행하면서 까지 지켜낸 나무는 손대패를 탄 후 기둥이 되고 보로 쓰였다.

기계 대패와 손대패의 차이는 돋보기로 관찰하면 이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튼 살이 일어나지 않아 도관이 선명하고 결이 매끄럽다. 이연성 목수가 종묘 문화재 보수 과정 중 확인한 단면과 유사한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수백 년 모진 비바람을 견뎌 온 우리 고건축의 건축 비법 중 하나가 손대패를 사용한 것이라는 게 이 목수는 설명. “건축주의 이해가 빠르니 시일이 오래 걸리더라도 전통기법을 지켜야 한다는 쪽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건축물이면서도 후대에 전해질 예술품이라는 관점에서 매달렸습니다.”  

 

 

 


송차선 주임신부는 서울교구 건축심의위원을 겸직 중인 건축가이다. 주임신부가 건축을 전공했다는 점은 설계자나 현장 목수의 처지에서는 여간 신경 쓰이는 일이 아니다. 그러나 예술에 가까운 성전을 짓겠다는 의기로 투합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오퍼스의 우대성 건축사는 물리적 존재감을 과시하는 종교건축물 보다는 가회동이 지니는 종교적 의미와 북촌의 환경과 조화로운 건축물을 구상했고, 총 3개 건축가가 나선 공개경쟁에서 이 제안이 최종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커피 내리는 신부님의 한옥 사랑



 


추녀와 추녀 사이를 긴 각목으로 연결하는데 이것을 평고대라 부르고, 평고대의 곡선은 곧 처마선이 된다. 가회동성당 한옥은 겹처마를 택했다. 보통 겹처마 집은 평고대 상단에 부연을 올리니 잔손이 많이 간다. 격이 높은 도편수의 솜씨가 아니고는 우아한 맵시를 살릴 수 없다. 자세히 살피면 평고대가 가리키는 ㄱ자 각도가 직각이 아니라 약간 틀어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본당 성전과 한옥간의 거리를 최대한 이격시키려 노력한 결과로 실측해보면 93도를 가리킨다. 만일 90도로 꺾여 들어갔다면 본당 성전과 거리 30Cm는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현장에서 기울인 노력은 압박을 깨고 구조체를 옮기는 난공사로 이어졌다. 그러나 목재만은 가공을 최대한 자제했다. 휘었으면 그 형상 그대로 서까래를 올렸다. 장인이 손길이 필요한 곳은 따로 있었다. 귀면와에 오병이어 문양을 새기는 세심함도 필요했다. 한옥 서편에는 쉼터로 쓰이는 정자가 자리한다. 이곳 정자 난간마다 꽃받침이 새겨졌다. 말하자면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꽃이 되는 은유적 공간을 만들어낸 것이다. 대청 분합문을 열어서 들어 올리면 안채와 정자는 한 공간이 된다. 정자에 머문 이도 내부의 사정을 살필 수있다. 안채에 들었든 바깥에 머물든 전유 공간은 그 채에 머물지 않고 안팎으로 확장되는 구조다. 한옥은 북촌을 오가는 사람들의 사랑방 구실을 하고 있다. 창호는 난방을 고려해 이건산업에서 근래에 선보인 한옥용 문을 사용했으나 들어 올리는 문짝만은 노련한 목수의 힘을 빌려야 했다.  

 

 

 


송차선 주임신부는 가회동성당을 찾은 4년의 시간을 성전 건축을 위해 받쳤다. 바리스타 자격증을 취득한 송 신부는 열린 문으로 들어서는 방문객들을 위해 손수 커피를 내린다. 커피 향에 나무향이 더해지고 또 새로운 인연이 완성된다. 금상첨화다.

재임기간이 마무리되는 내년까지 이곳을 찾는 이웃들을 위한 수고를 즐기겠다는 송 신부는 전 세계에 자랑하고 싶은 이곳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집


 

 


이제 본당성전과 사제관을 둘러볼 차례다. 가회동 성당은 3738.84㎡(1130평)에 이르는 대형건축물이다. 건축사 오퍼스팀은 한옥마을과 조화를 고려해 성당을 세 구역으로 나누고 건물을 땅에 묻고 담을 헐어냈다. 설계ㆍ시공ㆍ설비ㆍ음향ㆍ내부 마감ㆍ성미술 등을 어떤 방법으로 풀어갈지 세밀하게 계획해 실행에 옮겼다. 300석 규모의 성전은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발라우(balau) 집성목으로 채웠다. 우대성 건축가는 “오감을 만족하는 소재로 나무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 다소 비싸더라도 실내에 최대한 나무를 끌어들이고자 노력했다.

이곳의 비대칭형 창 형태도 주목할 만한 아이디어다. 창으로 뚫린 벽을 다양한 마름모꼴로 변형한 결과 성전 내부는 기하학적인 빛 형상이 머물다 사라진다.

 

 

 


성전 옥상은 북촌 전체를 조망하기에 적합한 곳이다. 문이 열리면 가회동과 계동 전체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어떤 곳은 주거 환경개선이라는 이름으로 전통한옥을 마구 허물어버린 흔적들이 부끄럽게 자리한다. 서구화가 근대화인줄 착각하던 시절에 벌어진 전통에 대한 폭력이다.

가회동성당은 옥상 역시 관리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에게 개방하자는 쪽이다. 중앙에는 종탑이 자리한다. 신축 전에 있던 낡은 종탑에서 건져온 물건이다. 연도를 따지니 1958년, 독일에서 들여온 것이다. 송 신부는 구 건물을 허물기전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물건들을 손수 챙겼다. 옛 성당 건물에 있던 십자가도 사제관 꼭대기에 다시 세우고 정문 표지석도 지하마당에 놓았다. 제작 연도가 불분명한 제례용 의자도 솜씨 좋은 목수의 힘을 빌어 오병이어 문양을 새긴 후 전시관에 놓았다.

성당 높이는 규모를 과시하기보다는 주변과 어울리도록 최대한 몸집을 낮췄다는 게 우대성 건축사의 설명이다. 그래서 암석을 깨고 지하 3층까지 내려가 터를 잡았다. 예식공간과 식당이 있는 지하공간은 성큰가든(sunken garden) 형식의 마당과 이어진다. 이곳도 접이식 문을 달아 마당과 내부공간이 큰 덩어리를 이루도록 설계했다. 지상부와 고도차는 계단식 정원을 꾸미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소나무를 가지 너머 지상부 한옥의 처마선이 엿보인다. 한 폭의 동양화라는 표현 외 달리할 것이 없다.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성전으로 이어지는 통로를 관찰하면 이곳에서도 미니 정원을 만날 수 있다. 옆집에 양해를 구하고 담을 허무니 훌륭한 정원이 덤으로 생겼다. 우대성 건축가는 이곳을 두고 공간은 잘 쓰여야 ‘좋은 장소’라고 부연했다. 유명한 건축 보다는 좋은 건축이 중요하다는 생각의 반영이다.

 

 

 

 

가회동성당이 자리한 이곳 북촌은 작은 인연들이 모여 옹기종기 마을을 이룬 동네이다. 또 어떠한 인연이 생겨 가회동 이름에 어울리는 화합을 만들어갈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다. 그래서 대문도 없고 경계도 없는 성당이다. 한옥과 현대식 건축물의 어울림 같은 낯선 만남이 형제자매가 되는 이치는 하늘의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가회동성당은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는 열린 공간의 진행형이다. 북촌의 새 집은 천주학의 불길이 당겨진 그 시점부터 예비된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문처럼, 이웃의 마음을 헤아리는 그런 따뜻한 손길과 배려가 깃든 집이 가회동을 찾아왔다.

사진: 윤준환 사진작가, 스튜디오꼬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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