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D SPECIAL...목수 ‘이순신’의 재발견

칼럼 / 편집부 / 2021-07-13 23:5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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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 관점에서 본 이순신 장군의 전과
조선 앞 바다에 히노키 5만 그루가 수장
판옥선의 저력은 소나무에서

 

 

한국사에 임진년은 큰 전쟁이 많았다. 52년 고구려의 낙랑 정벌을 시작으로, 512년 신라의 우산국 정벌, 1232년 고려의 강화 천도가 있었다. 1592년에는 전쟁의 쟁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임진년 흉년’으로 알려진 한국전쟁도 임진년에 있었던 비극 중의 비극이었다. 임진년이 알려진 대로 천간(天干)의 임과 지지(地支)인 진의 흙(土)를 매개로 하는 쇠(金)의 기운 탓일까.


여기에 木의 기운으로 쇠를 잠재운 명장이 있다. 그는 해전사에 길이남을 불패의 신화를 간직한 이순신이다. 장군은 첫 해전인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마지막 노량해전까지 7년의 임진왜란기간 동안 최소 23번의 해전을 치러 한 번도 패하지 않았다. 그의 곁에는 조선의 목조건축이 꽃피운 전투선인 거북선과 판옥선이 함께했다.

인터넷에 떠도는 우스개 중에 “이순신 장군은 ‘삼림 파괴자’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순신(1545~1598) 장군이 임진왜란 중 얼마나 큰 전과를 거뒀는지 일종의 반어법으로 보여주는 ‘이순신 삼림 파괴자론’의 실체는 이렇다.
 
목재 관점에서 본 이순신 장군의 전과

이순신 장군을 핵심으로 하는 조선 수군 함대는 임진왜란 첫 해인 1592년 주요 해전에서 적선 359척을 대파 혹은 격침시켰다. 여기에 기타 소규모 해전과 1597년의 명량해전, 1598년의 노량해전을 더하면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중에 격파한 일본 군함은 아무리 적어도 400척을 훌쩍 넘긴다고 볼 수 있다.

▲ 판옥선(문화재청 자료)

조선시대 군함을 제작할 때 작은 배라도 수십 그루, 큰 배를 건조할 때는 수백 그루의 나무가 필요했다. 길이 50~70자급의 대형 군함이었던 판옥선은 대송 12~14그루, 중송 80그루 내외, 소송 70그루 내외, 소소송 35~40그루 정도의 목재를 사용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함 중에 대형인 아다케는 판옥선과 비교할 수 있고, 일본측 중형 군함이자 주력 군함이었던 세키부네는 판옥선보다 작고 병선보다 더 컸다. 소형인 고바야는 병선과 비슷하거나 그보다 작았다. 거칠게 계산해서 일본 군함 1척당 평균 100그루의 나무가 필요했다고 가정한다면 임란 해전의 패배로 일본 측이 소모한 나무 수량은 4만 그루가 넘는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무기 제조의 필수 재료인 철을 조달하는 데 나무로 만든 목탄이 필수적이다. 철 생산에 필요한 1000도를 훌쩍 넘는 고열을 내기 위해서는 질 좋은 숯을 사용해야 한다. 전근대 동아시아 방식으로 사철을 채취해 1킬로그램의 철을 만들 때는 나무로 만든 목탄 17.5킬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한다.

일본 수군에서도 대량으로 사용한 조총에는 대략 2킬로그램 정도의 철제 부품이 들어간다. 군함 1척에 조총 20자루씩 탑재했다고 가정하고,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함의 피해 규모를 400척으로 잠정 추산하면 조총 손실량은 8000정이다. 그중 철제 부속의 무게는 대략 16톤이고 여기에 필요한 목탄의 양은 280톤이다.

■ 조선 앞 바다에 히노키 5만 그루가 수장되었다

주로 목재를 직접 짜 맞추어 군함을 만들었던 조선과 달리 일본은 철로 만든 철정으로 나무를 결합해 군함을 건조했다. 결국 일본 전통 군함의 철제 부속 양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다. 조선 후기 통신사선 제작에 필요한 철제 부속의 양은 최대 2천근, 척당 약 1.2톤이 된다. 역시 일본 군함 1척 제조에 평균 1t의 철이 필요하다는 잠정적 수치를 적용해 계산하면 철의 소요량은 400톤이고, 그 철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목탄의 양은 7천t이나 된다.

▲ 여수 앞 바다에 떠 있는 거북선 모형

이처럼 무기 제작과 배에 필요한 철을 생산하기 위해 7천280톤의 숯을 조달하려면 필요한 나무는 얼마나 될까. 나무를 고품질 숯으로 만들면 원래 나무 무게의 1/10 정도로 줄어든다고 한다. 즉 필요한 나무는 7만 2천 800톤에 달한다.

나무 1그루의 무게는 그야말로 천차만별이지만 평균 5톤의 거목을 쓴다 해도 1만 4천 560그루가 필요하다. 여기에 군함 건조에 직접 들어가는 나무 4만 그루가 추가된다.

즉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을 중심으로 한 조선 수군이 거둔 전과를 나무로 환산하면5만 그루가 넘는다. 일본측 시각에서 보자면 임진왜란 해전의 대패는 나무 약 5만 그루의 손실과 동의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이 거대한 숲을 없애고 건설한 대함대와 그 무기들이 이순신 장군의 활약 덕에 거센 파도 속으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물론 추정과 가정에 기반을 둔 잠정적 수치를 적용한 계산이기 때문에 5만 그루라는 수치 자체에 최종적이고 확정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임진왜란이라는 전근대 전쟁이 작동되는 거대한 메커니즘 구조 속에서 나무가 차지했던 압도적 비중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전근대 군대의 핵심 물자였던 나무

사실 나무는 전근대 군대를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핵심적인 전략 물자였다. 전근대 무기 중 그 어느 것도 나무 없이는 만들 수 없었다. 일본이나 영국에서 많이 썼던 활인 장궁은 나무 그 자체였다. 특히 영국에서 많이 사용한 장궁 계통의 활인 롱보우는 주목(Yew) 그 자체로 만든 활이었다.

조선시대 각궁의 경우 활의 뼈대는 대나무와 산뽕나무를 사용해서 만들고, 손잡이 부분의 대림목에는 참나무를 썼다. 화살도 화살대를 만들려면 대나무나 싸리나무가 필요했다. 화살대의 대나무도 아무 것이나 쓴 것이 아니라 바닷가 양지 바른 곳에서 자란 2년생 대나무를 ‘해장죽’이라고 부르며, 최고로 쳤다.

▲ 거북선 갑판의 대못

전근대 무기 중 대표적인 존재 중 하나인 창의 자루도 나무로 만들었다. 일본 전국시대에 많이 사용한 장창은 자루길이가 3~4미터에 달했다. 짧은 창도 자루 길이가 1미터를 훌쩍 넘기 때문에 수십만 명을 무장하려한다면 그에 필요한 나무의 수량은 결코 만만치 않았다.

총의 금속제 총열을 감싸는 총가(銃架) 부분을 제작할 때 오늘날에는 나무 외에 플라스틱 계열의 소재도 많이 쓴다. 총가는 발사 충격을 흡수해야하고, 열전도율이 금속보다 낮아 손으로 직접 쥐는데 문제가 없어야 한다. 전근대 시대에 그런 조건을 충족하는 재료는 나무, 다시 말해 목재 밖에 없었다.

조선시대 조총의 총가는 주로 가시목을 사용해 만들었다. 이 나무는 가시가 있는 가시나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참나무 계통 나무의 한 종류다. 가시목은 특유의 내구성과 형태 변형이 적은 특성 때문에 조총 총가 외에도 창의 자루 제작용으로도 인기가 높았다.

전근대 육군은 물론이고 전근대 해군은 나무 그 자체였다. 배의 선체를 제작할 때 나무 이외의 소재를 사용하는 것은 19세기 이후에야 본격화되었다. 그 이전에는 군함은 곧 나무로 만든 목선이었다. 당연히 역사상의 대해군국들은 군함 제조용 목재를 조달하는 데 큰 관심을 가졌다. 고대 그리스가 해군 군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나무를 남벌하는 바람에 그리스의 삼림이 파괴되었다는 주장이 있을 정도였다.

17세기 이후 전성기의 대영제국 해군은 떡갈나무(Oak)로 선체를 만들고 느릅나무로 용골을 제작했다. 해외 식민지가 확대되면서 점차 수입 티크목(teak)이나 마호가니를 사용해 군함을 건조하기도 했다. 영국 해군 주력 군함은 전열함은 선체에 두께 10센티미터의 나무를 사용했고 포갑판만 3층이 넘는 거대한 선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목재 조달은 해군 유지의 필수적 선결요건이었다. 함포 74문을 탑재하는 전열함을 건조하는 데는 무려 마차 2천~3천대 분량의 목재가 필요했다.

임진왜란과 목제 군함 판옥선

1592년부터 1598년까지 임진왜란이라는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그 누구보다 맹활약한 이들이 바로 조선 수군이었다. 그 수군을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전술 구사 능력과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탁월했던 군인이었지만,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 할지라도 맨손으로 싸울 수는 없는 법이다. 그 같은 이순신의 탁월한 능력을 물질적으로 뒷받침했던 존재 중에 하나가 바로 판옥선(板屋船)이었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주력 군함이었다. 거북선의 독특한 겉모습 때문에 판옥선의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가려진 면이 있지만, 전체 조선 수군 전력에서 판옥선이 차지하는 위상은 절대적이었다. 판옥선도 당시 군함이 모두 그렇듯이 나무로 만든 목선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수군도 나무와 결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던 셈이다.

▲ 해군사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조선수군조련도의 판옥선

판옥선은 조선 전기의 주력 군함이었던 맹선에 갑판 한 층을 더 만들어 3층으로 만든 배다. 우리나라 전통 배인 한선(韓船)의 주갑판(Main Deck)을 포판이라고 하는데, 포판 위에 ‘상장’이라 부르는 2층 갑판을 둔 배가 바로 판옥선이다. 포판 아래에도 병사들이 휴식할 수 있는 선실이 있으므로, 선실까지 포함할 경우 전체 높이는 3층이 된다.

이처럼 갑판이 2중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노를 젓는 요원인 격군(格軍)은 1층 갑판에서 안전하게 노를 저을 수 있고, 전투요원들은 2층 갑판에서 적을 내려다보면서 유리하게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선체 길이가 20~30미터 정도였던 판옥선은 임란 해전에 참전한 양국 군함 중 크기가 가장 큰 편에 속한데다가 선체도 높아 덕택에 일본군이 그들의 장기인 승선전투전술(Boarding Tactics)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는 효과도 거뒀다. 이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도승지였던 이항복은 “판옥선은 마치 성곽과 같다”고 그 성능을 격찬했다.

전근대 해전에서는 상대방 군함으로 건너가 마치 지상에서처럼 칼과 창으로 싸우는 경우가 흔했다. 조선군은 기본적으로 활과 화약무기 같은 원거리 무기를 능숙하게 사용했지만, 칼과 창 같은 단병무기를 운용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서툴렀다.

이 같은 약점을 극복하고 조선군이 해전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이 승선전투전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조선의 장기인 활과 대구경 화약무기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군함이 필요했다. 판옥선은 그 같은 요구를 충족할 수 있는 군함이었고, 그 같은 성능이 이순신 장군의 뛰어난 능력과 결합했을 때의 결과가 바로 임란 해전의 승리였다.

판옥선의 저력은 소나무에서

판옥선의 우수성은 이처럼 설계상의 특성에서 찾아볼 수 있지만 목재 재질과도 관련이 있다. 판옥선을 비롯한 한국의 전통 배는 기본적으로 주재료로 소나무를 사용한다. 배 앞부분의 이물비우나 방패판 등 높은 강도가 필요한 부분은 상수리나무나 졸참나무 같은 참나무 계통의 나무를 사용했지만 선체 대다수를 차지하는 좌우 측면의 삼판, 주갑판인 포판 등에는 소나무를 주로 썼다.

한국의 소나무는 옹이가 많고 굽어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불규칙한 목질의 특성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배를 만들 때 판재를 두껍게 가공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한국 전통 배들은 두께 12~18센티미터의 두꺼운 판자를 사용했고 최종 가공도 다소 투박한 점이 있었다.

우리나라 소나무 중 선박 제조에 많이 사용한 적송의 굴곡강도는 526~977kg/㎠, 브리넬 경도도 2.20~5.80 정도였다. 이 정도라면 전근대 유럽에서 선재로 많이 사용한 떡갈나무에 비해서는 약간 강도가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임진왜란 당시 일본 군함에 주로 사용한 삼나무의 굴곡강도 300~750kg/㎠, 회목(편백)의 굴곡강도 510~850kg/㎠에 비해서는 우세했다.

더욱 문제는 당시 일본의 전통 선박들은 전반적으로 판재를 얇게 가공했다는 점이었다. 삼나무 등 당시 일본의 조선용 목재는 기본적으로 소나무에 비해 가공하기 쉬운 목재였기 때문에 얇고 정밀한 구조로 만들어졌다. 이런 목재의 특성 차이는 함포전과 우발적 충돌에서 조선의 판옥선이 일본 군함에 비해 우위를 누릴 수 있는 밑바탕이 됐다.

▲ 일본 도쿄의 선과학관에 전시된 세키부네 모형

임란 해전 승리는 나무를 이용해 준비됐다

임진왜란 초반에 집중적으로 벌어진 해전에 주로 활약한 일본 군함은 세키부네(關船)였다. 세키부네는 일본에서 흔히 야마토형 군선(大和型 軍船)의 대표적 존재로 간주할 만큼 일본인의 자부심이 서려 있는 배다.

세키부네에도 부분적인 2층 갑판이 있긴 했지만 선체 전체 높이가 판옥선에 비해 낮고 선체 크기도 작아 기본적으로 인원ㆍ무기 탑재 능력이 판옥선에 두드러지게 열세였다.

임진왜란 당시 판옥선이 최소 120명 이상의 전투원과 비전투원을 탑승시킬 수 있었고, 임란 이후 조선 후가의 판옥선은 200여명에 가까운 사람이 탑승할 수 있었다. 이에 비해 노가 40개 정도인 세키부네에는 비전투요원인 수부(水夫) 40명과, 조총병 20명을 포함해 70~80명이 탑승했다.

또한, 판옥선이 대포에 해당하는 지자ㆍ현자ㆍ별황자총통을 안정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던데 비해, 기껏해야 1~2문의 대포만 탑재하고 주로 조총으로 전투를 수행한 세키부네는 화력 면에서도 판옥선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역사학자들은 흔히 조선왕조가 임진왜란 전 200여 년 동안 전쟁을 잊고 살았다고 말한다. 그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전쟁에 대한 대비를 전혀 안한 것은 아니다. 외침을 걱정하는 인물들이 적지 않았고, 그렇게 국가의 운명을 예측하면서 미래를 준비하는 이들이 부족하나마 국방의 주춧돌을 놓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벌어지기 불과 40여 년 전 무렵인 1555년을 전후해 판옥선을 개발한 것이 대표적 사례다. 판옥선은 한국 소나무의 장점을 살리고, 약점을 보완할 수 있도록 제작한 군함이었다. 임란 해전 승리는 전쟁 시작 40여 년 전 부터 나무를 이용해 이미 준비되고 있었던 것이다.

김병륜: 국방일보 취재기자,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객원연구원. 디펜스코리아 자문위원을 거쳐 현재 국방일보 취재기자로 근무하고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동북아시아 지역의 군사사를 연구하고 알리는데 관심이 많다. 특히 숨겨진 우리의 군사 관련 역사를 집요하게 추적하여 밝히는 것을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저서로 [군사전문인을 위한 인터넷] 등 단행본과 <조선시대 학익진의 도입과 운용> 등 6편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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