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 인터뷰] 물과 바람, 돌로 지은 고도의 건축가, 이타미 준과 나눈 대화

건축 / 유재형 기자 / 2021-07-05 15: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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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2011년의 마지막 겨울, 제주 핀크스 골프장에서 고(故) 이타미 준 선생을 만났다. 그는 제주의 바람과 돌, 물을 두고, 여전히 가슴 미어지거나 달콤하거나 털털해지는 법을 연구 중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나눈 대화는 이타미 준이 남긴 글과 말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다. 고인은 가고 없으나 겨울 제주에서 그의 행적을 좇는 후인의 삶은 여전히 분주하기만 하다. 한국인 유동룡의 이름 앞에.

▲ 자연과 일체하는 포도호텔 풍경 


빛은 바람을 타는 것이라 들었습니다.
그것을 시정(詩情)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두 개의 객체가 만나 하나의 거대한 세계를 이루는 것. 서정적인 것은 그와 합당한 언어를 만나 시가 되는 것입니다. 건축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훌륭한 건축이라 불리기 합당한 이유는 위대한 만남의 요소들이 이뤄낸 것입니다. 제주와 나의 만남도 그러했습니다.
“건축과 예술 사이 그리고 일본과 한국 사이에서 건축을 통해 예술을 사랑하고 거부한 한 인간의 생각과 시각이 서툰 문장 속에서 숨 쉬는 듯합니다.” (2004년 1월 도쿄 이타미 준)
건축의 공간에 한국의 제주가 있다는 것은 앞서 말한 ‘사이’의 간극을 메울 만한 힘을 가져다줍니다. 자연과 어우러지고, 종국엔 지독한 감기를 앓듯 그것을 추앙하게 만드는 제주의 자연이 내 건축의 팔 할을 이루었습니다. “주위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건축물이 들어설 장소와 공간에 대해 깊고 냉철하게 생각하였으면 합니다. 또 자연의 힘을 거스르지 않으며 건축가 스스로 납득할 수 있는 형태를 찾아야 합니다. 특히 조형은 바람을 절대 거스르지 않아야 하며, 자연의 힘인 바람에 관한 것은 바람에게서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건축을 이루는 예술적 요소는 각각 개별적인 것으로 보이나 치밀하고, 조직적인 힘을 바탕으로 무형의 시원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포도호텔 객실내부

 

▲ 건물 통로에서 보는 제주 풍경

 

▲ 한라산의 지표 접경면을 상상하게 하는 처마 디자인

 

▲ 공예적 공간을 느낄 수 있는 복도 

당신이 설계한 포도호텔의 직원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타미 준의 과업에 비하면 초라한 것이라 실망하는 이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화려하다’는 말과 ‘훌륭하다’는 것은 별개의 사항인 것 같습니다.
“어느 틈엔가 야성미가 느껴지는 건축이 사라지고 화려한 작품만 화제에 오르고 있습니다. 탁월한 사상에는 체온 같은 것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탁월한 건축에도 따스한 체온 같은 것이 있지 않을까요.” 기능에만 충실한 차갑고 지루한 공간을, 화려한 장식을 달고 덩치를 키워 규모로 압도하는 일은 어찌 보면 무척 쉬운 일입니다.
이제 공간과 규모의 차이점을 말하겠습니다. 건축물 자체로는 뛰어나지만 종종 주변 환경과 불화를 겪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주위를 둘러싼 능선과의 조화, 원주민의 삶을 거스르지 않는 방식, 지형이 허락한 크기에서 소통할 때 조화롭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때 비로소 바람과 빛과 돌과 나무도 자연스러울 수 있습니다. 공간은 규모에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이치를 담고 있는 크기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면서도 존재감을 느끼게 하지 않는 로봇처럼, 말 그대로 그림자 같은 건축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를 경탄하게 만들 것입니다.”

건축가들은 종종 건축은 과한 것을 들어내는 작업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당신의 작업은 처음부터 계획된 부족함이라는 뜻인가요.
그리스 여행 중 파르테논 신전을 직접 발로 밟은 적이 있습니다. 제주도의 건축물은 파르테논 신전에 비하면 훨씬 미급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연을 닮고자 한 순수성과 열망을 품은 조형적 아름다움에 있어서는 절대 뒤지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주도는 바람, 돌 그리고 여자로 유명한 곳입니다. 돌, 물, 바람의 3개 박물관은 제주도의 전설에 따라 이름 지어진 것입니다. 이곳의 건축적 구조는 예술박물관의 양식을 따르지만 이곳에는 어떤 예술가나 예술품에 대한 표시도 없습니다.

 

▲ 물의 건축은 제주의 바다를 연상하게 한다.

 

 

▲ 바람의 건축 내부 목재는 멀바우를 사용했다.

 

▲ 돌의 건축은 공예적 구성이 돋보인다.

 

당신의 주장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생각하게 만듭니다. 베케트가 한 일은 ‘변함없는 시공간을 창조한 일일 뿐, 아무런 사건도 전개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시공간 창조가 제주도에서 한 일의 전부인가요.
“창조의 주체인 인간의 온기와 생명을 통찰하여 디자인의 밑바탕에 깔지 않는 한, 진정 새로운 존재를 얻을 수 없습니다.” 희곡상의 두 주인공인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극 중 티격태격 싸우는 듯 보이나 실상은 아무런 주장도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 희곡은 ‘에스트라공 : 자, 그럼 가볼까?, 블라디미르 : 응, 가세나. (그들은 꼼짝 않는다)’로 대표되는 의미일 뿐, 대립자도 주인공도 따로 없는 갈등구조를 펼칩니다.
건축과 환경도 그렇습니다. 두 주인공이 ‘우리는 행복하다’고 말한 다음 ‘이제 우리는 행복하니까, 그 다음은 뭘 하지?’라고 질문했을 때 ‘고도를 기다려야지’하고 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썩 재밌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이 희곡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고도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제주로 무대를 옮겨볼까요. 자연의 특징이 가득한 이곳 제주와 건축은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의 관계라 볼 수 있습니다. 자연과 건축이 다투어 주인공 자리를 탐하지 않으며,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 순수한 경쟁 속에서 인간은 단지 고도를 생각할 뿐입니다. 또한, 질문에서 언급한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시공간에 대한 자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범주이므로 질문자 자신에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이타미 준에게 ‘한국’과 ‘건축’은 무엇이며, ‘예술’이란 무엇입니까.
도쿄에서 태어난 저는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유동룡으로 지냈습니다. 조국에서 떨어져 한국 문화를 접하면 조국에 대한 상념에 접어들곤 합니다. 원래 꿈이 화가였기에 미학에 대한 향수를 품고 살았습니다. 거기서 발전한 것이 ‘건축은 미학이다’입니다.
제가 한국의 아름다움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제 몸에 흐르는 피와 저를 둘러싼 환경이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닐까요.”
건축은 자연의 섭리를 충실하게 반영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섭리를 따르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건축가 스스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은 일본과 한국을 가리지 않고 골고루 뿌려져 있습니다. 제 어머니는 과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돌의 아름다움도 강과 물과 돌과 이끼가 있어 아름다운 것이지. 그 중에 하나만 없어도 제 아름다움을 다 드러낼 수 없는 거야.”
자연의 섭리는 차별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자연의 조화로움을 따르는 것이 예술의 시작입니다. 공간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깊은 생각을 통찰하는 건축가의 마음의 눈이 필요합니다. 건축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따르는 공간을 추구하기 위해 건축가는 “그 지역에서 자연적으로 도출시킨 전통적 맥락과 건축가 스스로의 강렬한 바람, 그리고 자유로운 생각이 반영된 건축학적 감각을 갖추는 마음의 눈”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토대의 상당부분이 한국에 속해 있으며, 또 위에서 밝힌 바가 건축 미학을 정의하고 있다고 여긴다면 예술과의 차이점을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 제주 방주교회
▲ 방주교회 외부는 물의 정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 방주교회 내부에 사용한 목재는 이로코로 유림목재에서 제공했다. 


제주 핀크스를 걸으며 무슨 생각을 하셨나요.

이 바람의 섬(제주)은 오묘하게도 거리상 일본과 한국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저 자신의 위치를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여기 핀크스 내 포도호텔을 안내할 곽성민(현 SK핀크스 기획담당) 씨를 소개합니다.

편집자 : 방문객이 이곳 객실(40평형 로얄실)을 보고 주로 무슨 말을 하나?
곽성민 : 한국풍과 일본풍이 조화를 이룬다고 말한다.
편집자 : 협탁에 이타미 준 화보가 놓여있다.
곽성민 : 전 객실에 놓여있다. 가치를 알아달라는 제스처이다.
편집자 : 주로 찾는 고객들은 어떤 분인가?
곽성민 : 설립 초반에는 골프 내장객들이 주를 이루었으나 지금은 가족단위의 일반 여행객들도 많이 찾는다. 휴양과 사색을 즐기기에 이만한 곳이 또 있는가. 이곳의 해발 고도는 350m이다. 그만큼 쾌적한 자연환경을 제공한다.
편집자 : 그런데 왜 이름이 PINX.인가.
곽성민 : 그건 이타미 준 선생이 답해 줄 것이다.


핀크스(PINXIT)는 라틴어로 ‘하늘의 미’를 의미합니다. 핀크스 프로젝트 시리즈는 하늘에 의해 형성된 창조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또 영어로는 ‘그림을 그리다, 그림에 서명을 하다’는 뜻입니다. 즉 작(作)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앞서 소개했듯이 나의 꿈은 화가였습니다. ‘그리다’, ‘그림’의 의미는 내 건축세계를 이해하는 시작입니다. 핀크스(PINX.)는 자연이 그려놓은 그림에 서명을 한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회한 건축가가 자연 앞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서명 하나 다는 것뿐, 제주의 자연이 이 모든 것을 설계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을 기대한 이에게 실망을 안겨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수수한 모습의 클럽하우스를 두고 이견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동선도 크지 않습니다. 제주 오름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 단층으로 설계한 이유는 바람이 많은 제주도의 특성을 살리기 위함이기도 하나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원래 있는 존재처럼 느끼게 만들려는 의도가 컸습니다. 소박한 것이 더욱 큰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화려한 색깔을 입은 제주의 여타 클럽하우스를 방문해보면 알 수 있습니다. “건축을 한다는 것은 과연 어떤 일일까. 그렇게 폼 나는 일일까? 현실적인 형태를 추구하는 천형(天刑)과도 같은 일입니다. 기능과 마주하다 보면 건축물들이 호흡하면서 마침내 공기 속에 녹아들기 시작합니다. 그때야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는, 그런 작업의 반복입니다.” 자연의 눈치를 살피는 일. 이것은 내가 제주에서 수백 번, 수천 번을 반복한 천형입니다. 세계적인 건축가의 작품은 반드시 크고 화려해야 한다는 선입관은 ‘아름다운 오해’ 쯤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당신이 남긴 네 곳의 박물관을 둘러보며 우리는 인간이 형용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찬사를 연발했습니다. 이 순간 당신도 우리 곁에서 함께 했을까요.
제주에 머무는 동안 돌과 바람의 소리가 당신을 맞았을 것입니다. 저 역시 그러했습니다. 나는 이 감흥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당신들 역시 자신의 방식으로 이것을 이해했으리라 믿습니다. 돌과 바람과 물 박물관이 존재하기 이전에도 이곳엔 돌과 바람과 물이 존재했던 공간입니다. 제가 느낀 감흥이 어찌 당신들과 다를 수 있겠습니까. 단지 자연 속에서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위해 바치는, 또 다른 자연인 ‘건축’을 행했을 따름입니다. 이 건축은 제주의 자연에 대한 찬사이며, 인간에 대한 찬가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도 자연이 있는 곳에 서면 나와 같은 상상을 펼칠 수 있으리라 여깁니다. 

사진제공: ITM 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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