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사색] 부유하는 스툴

칼럼 / 편집부 / 2019-04-15 14: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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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텨라. 이겨라. 버티는 게 이기는 거다. 미생의 오차장이 장그래에게 남긴 말이다. 오늘 하루를 버티니 또 다시 이겨내야 할 내일이 남았다. 사는 게 으레 그러려니 체념한다. 헛헛한 마음은 집으로 가는 길을 늦춘다. 게으른 걸음은 결국 외진 골목의 작은 술집으로 방향을 바꾼다. 


삼삼오오 짝을 이뤄 수다를 피우는 테이블을 외면하고 찾아온 이에게 무관심한 바텐더 앞 스탠드바로 향한다. 바의 높이에 맞춘 키높이 스툴에 엉거주춤 걸터앉는다. 바닥에 닿지 않은 구두 밑창이 간지럽다. 오늘 하루도 이만큼 떠있었겠구나. 짐작한다. 


제출하지 못한 서류가 생각난다. 잊었던 대출이자 상환일이 떠올랐다. 퇴직을 한 아버지는 매일 생활정보지를 뒤적이고 계셨다. 연봉을 다시 계산해 봐도 월급이 오를 리 없다. 나오는 한숨을 낯선 이름의 와인 한 모금으로 다시 집어삼킨다. 연거푸 몇 잔을 들이켜자 취기가 오른다. 


담배 생각이 간절해 재떨이를 찾으니 실내 금연이다. 담배를 끊으면 아이 학원 하나를 더 보낼 수 있다고 한숨 쉬던 아내가 떠올랐다. 문득 사십 평생 남은 건 오직 담배 한 개비뿐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툴에서 내려오며 부유하던 두 발을 땅에 내려놓았다. 올라갈 때와 달랐다. 두 발이 중력을 잃은 듯 휘청거렸다. 아무 벽에나 기대 주머니를 뒤져가며 라이터를 찾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집이다. 받으니 묻는다. “어디야?” 가는 길이라고 말하니 통닭 한 마리를 주문한다. 통닭을 기다리는 아이들의 고함소리가 배경음처럼 들렸다. 남아있던 알코올이 순식간에 발화했다.


계산을 위해 스툴 옆에 다시 섰다. 허리춤까지 오는 스툴이 꽤나 높다. 등받이도 없고 바닥에 발이 닿지 않아 불편한 의자다. 그런데도 여기에 앉아 바에 기대면 온 몸의 무게가 사라지는 기분이다. 질량이 사라지면서 걱정거리도 희미해졌다.


다시 한 번 스툴에 오를까 고민하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가는 길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남겨둔 내일이 생각났다. 힘겹게 버틴 오늘이 헛되지 않도록 한없이 늘어지는 걸음을 재촉했다. 술이 아닌 다른 것에 취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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