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택 개인전, 무위재고(無爲再顧)...은일(隱逸)한 사물의 기척

아트 / 육상수 칼럼니스트 / 2021-08-18 01: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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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더페이지'에서 8월 20일 오픈
무위적 관점으로 공예를 관조
은일한 사물에 대한 철학적 해석
▲ 'Dumbung-jucho'

 

눈꽃이 지는 자리는 다른 데가 아니다. 태양과 달이 움직이는 궤도 또한 여전하다. 사물이 자리하는 ‘데’와 ‘둠(두다)’은 그 실체의 본질을 나타낸다. 늘 그곳에 있다는 것은 어제와 오늘, 개념과 실제, 이곳과 저곳으로 분파하지 않는 사물의 은일(隱逸)한 어느 한 지점을 말한다. 그 자리는 모든 이치의 근원이면서 무경계의 미학이며 무위(無爲)의 세계다.

정명택과 그의 사물은 은일한 상태로 놓인 어떤 사물의 역사성과 그 역사성을 지탱하고 있는 ‘둠’에 대한 사려와 해석으로, 우리를 무위 상황으로 이끌고자 한다.

사방 8개씩 질서정연하게 배치된 채 숨죽이고 있는 경주의 황룡사지 주춧돌, 일탑식가람의 정림사지 터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의 모습으로 천년을 훌쩍 뛰어넘어 지금에 이른다. 오백년 한옥 고택의 대청마루와 부석사 주춧돌과 그 위의 소나무는 낡아 쓰러지면서도 둠의 자리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있다. 이 사물들의 불변행위는 자발적 자유의지와 능동적 행위의 결과로, 있는 그대로 이루어짐을 추구하는 무위의 자연성 원리 사상을 ‘모습’으로 대신하고 있다.

무위는 인위(人爲)의 상대 개념이면서 무심(無心)과 무형(無形)의 궁극체이다. 만물을 생성케 하는 근원으로 일체의 규칙과 의도를 배척하고 오로지 자유의지로 세상을 다듬는 일체심이다. 현대미술 장르의 하나인 ‘포스트모더니즘’이 그 속성과 궤를 같이 한다. 태양이 떠있을 때 횃불이 의미 없는 것처럼 무심과 무형은 무위의 부분성 혹은 구성인자일 수밖에 없다. 

 

정명택의 사물들은 기물들의 ‘둠’ 상황을 일깨워 졸박하면서도 공교한 자연미와 불언(不言)의 미학을 표식한다. 어떤 사물은 매우 익숙하고 어떤 사물은 낯설다. 이는 ‘있음과 없음’이라는, 존재와 부존재성의 내면 충돌에 기인한다. 작품 ‘Dumbung-jucho’와 'Maru’는 ‘있음에서 있다’의 현상이라면, ‘Arcaded Seat’, ‘On the Rock’, ‘Ambiguous Space’, ‘Crack’은 ‘없다에서 있음’을 작동한 결과이다. 익숙한 것은 ‘둠’에서 자리를 옮긴 ‘있다’고, 낯선 것은 새로운 ‘둠’이어서 아직은 ‘없다’이다. 그래서 익숙하기도, 낯설기도 하다.

 

▲ 'Maru'

 

미술사학자 고유섭은 “구수하다는 것은 순박, 순후(淳厚)한데서 오는 큰맛이요, 예리(銳利), 규각(圭角), 표렬(漂冽) 이러한 데서는 오지 않는 맛이다. 그것은 심도에 있어 입체적으로 온축(蘊蓄)된 맛이며 속도에 있어 질속(疾速)과 반대되는 완만한데서 오는 맛이다. 따라서 얄상궂고 천박하고 경망하고 교혜(巧慧)로운 점은 없다”고 했다. 또한 정명택은 스스로 “무위는 제 뜻만으로 살아가는 경위를 넘어 몸과 마음의 기를 누그러뜨린, 안온함을 지키는 일”임을 자임했다.

그는 역사의 허리에 걸터앉아 좌망(坐忘)하면서 물질과 형상의 본질을 자각하고자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아니라, 이미 세상이 모두 소유한 형태를 다시 주장하거나 한 시절을 이루려는 작자의 욕망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다. 오로지 관망하고 세상의 흐름에 의탁하려 애썼다. 자연이라는 물질세계와 물리현상을 익히면서 사물이 생명으로 자생하는 현상에 몰입했다.

그는 노자가 말하는 ‘자유자재하면서,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사물의 실상과 합일로써 얻어지는 정신적 원만성’ 외에 그 무엇도 구하지 않았다. 다만 스스로 그러한 대로 일구어가는 작업을 통해 무위의 사물체계를 터득하고자 했다. 덧붙여 ‘날로 덜어 내고, 덜고 또 덜어서 함(行)이 없음에 이르면,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못하는 것이 없음‘에 자신을 위탁하고 정화함으로써 사물의 본래성에 다가갔다.

 

▲ 'Arcaded Seat’, ‘On the Rock’

정명택은 생명이 다한 140개의 대청마루 조각을 옮겨와 스툴로 재생한 일련의 과정에서나, 덤벙주초의 모나고 거친 표면 위에 놓일 기둥의 밑동을 상상하면서 자리와 둠에 이르는 과정을 톺아볼 뿐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그의 조형물은 ‘시간의 자리’를 선명히 읽히게 하는 역사적 경험을 체득하게 한다. 사리에 눈이 멀어 헤매지 않으면서 인간의 의식을 초월한 자연행위가 바로 정명택이 추구하는 예술의 근본 개념이다.

물고기가 물속을 가르고, 새가 창공을 나는 자연스러움은 눈꽃이 지는 자리와 일맥, 일통하는 무경계의 이데아이면서 무위의 시원(始原)이다. 서투른 듯, 어눌한 듯, 부족한 듯에서 오는 사물의 믿음직함은 명치끝이 조여오는 묵직한 통증으로 갈무리한다. 그는 산의 정상에 오르는 선수가 아니라 산허리 벼랑 끝을 따라 헤매는 작가로 생존하면서 생과 물질의 겸양미를 조각하고자 했다.

정명택의 무위(無爲)는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광명의 시대를 기다리는 은일한 사물의 체계 안에 놓여 있다. 그 체계는 사물의 역사가 잘 통과할 수 있도록 가느다란 틈새를 유지하고 있다. 동일성 속에서 점진적인 차이를 포용하는 평등성, 뾰족한 물리적 충돌이 아닌 완벽한 평형과 대칭에서 비롯되는 차별성 그리고 현실과 비현실, 과거와 현재, 실용과 실제의 구분이 사라진 일체성미학이 정명택의 예술적 단서이면서 기척의 어느 지점이다. ‘완성’이라는 미명하에 작가를 위축시키고 관객을 주눅들게 하는 ‘신화’를 정명택과 그의 작품들은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은일한 사물의 기척점에서 군무하는 무위 세계의 서막이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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