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의 이해-1> 공예의 의미, 역사적 변용과 현대적 상황

칼럼 / 최범 / 2021-08-30 00:0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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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이해하는 공예의 흐름
현대 조형 공예의 위기진단
공예는 가장 오래된 예술이면서 가장 새로운 예술

공예의 의미와 역사

공예는 손으로 만든 물건이다. 이보다 간단하면서도 완벽한 공예의 정의는 없다. 공예의 정의는 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정의가 공예의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공예의 정의에는 역사적으로 변화해온 공예의 구체적 의미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공예를 ‘손으로 만든 물건’이라고 정의하더라도, 이 정의가 의미하는 바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시대에 따라 달리 이해되어왔다는 것이다. 이는 밥이 먹는 것이고 옷이 입는 것이라는 기본적인 정의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겠지만, 이것만으로는 인간 역사와 문화 속에서 밥과 옷의 변화와 다양함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공예의 정의 역시 아무리 시대가 바뀌더라도 변하지 않겠지만,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 역사와 문화 속에서 변화해온 공예의 의미와 다양함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공예의 정의 자체도 역사적으로 변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확하게 말하면 공예의 정의가 변한다기보다는, 공예의 정의가 역사적으로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이해되어온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 다시 기본 개념과 역사적 개념으로 구분해볼 수도 있겠다. 이때 기본 개념은 ‘손으로 만든 물건’이라는 것이고, 역사적 개념은 특정한 역사적 조건 속에서 ‘손으로 만든 물건’이라는 것이 어떻게 이해되고 의미화 되는가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공예의 기본 개념(정의)은 달라지지 않지만 그 개념의 구체적 의미는 역사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공예가 역사적으로 변화해왔다는 사실이 공예의 본질을 가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식생활이 다양하게 변화해왔다고 하더라도 음식이 먹는 것이라는 본질 자체는 전혀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식생활에 대한 논의는 그것이 아무리 확대된다고 할지라도 음식이 먹는 것이라는 개념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공예가 손으로 만든 물건이라는 기본 사실을 망각하거나 부정하는 관점으로부터 공예 논의가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예의 기본 개념을 정확히 인식하면서도, 그것을 역사적 지평 위에 올려놓고 이해해야 하는 이유이다. 공예의 정의가 공예 이해의 필요조건이라면 공예의 역사는 공예 이해의 충분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공예를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조형예술의 역사와 공예의 변용 1)

1) 이 주제에 대한 보다 자세한 설명은 다음을 참고할 것. 최 범, ‘미와 실용성: 근대 조형예술에서의 문제’, <공예를 생각한다>, 안그라픽스, 2017

공예는 역사적으로 두 번의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하나는 16세기 미술의 등장으로 인한 것이고 또 하나는 19세기 산업화의 결과이다. 미술은 공예의 위상을 하락시켰고, 산업화는 공예 생산의 위기를 초래했다. 주지하다시피 공예는 가장 오래된 조형예술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랫동안 공예만이 존재했다. 16세기 이전에는 미술도 공예의 일종에 지나지 않았다. 20세기 이전에는 디자인도 공예에 속했다. 그러니까 미술과 디자인은 모두 공예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다. 근대 이전에 공예는 예술과 기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영역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형예술의 역사는 곧 공예가 분화되는 과정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예로부터 미술이, 그리고 디자인이 분리되어 나왔다. 이는 조형예술의 다원화 과정이자 동시에 공예의 상대화 과정이기도 했다. 공예만이 존재하다가 미술이 발생했을 때 조형예술은 이중구조가 되었다. 그러다가 디자인이 등장하면서 조형예술은 삼중구조가 되었다. 오늘날 공예는 미술, 디자인과 함께 조형예술의 삼중구조를 이루고 있다. 그러니까 현대공예는 단독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미술, 디자인과 함께, 조형예술이라고 부르는 체계 속에서, 그 일부로서 존재한다.

공예로부터 미술의 분화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루어졌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fine art)은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것이다.2) 공예만이 존재하던 시대로부터 공예와 미술이 공존하는 시대로의 이행, 이는 조형예술 역사상 최초의 분화이자 동시에 커다란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 발생적으로 보면 공예는 미술에 선행(先行)하지만, 인식적으로 보면 공예는 미술에 후행(後行)한다. 무슨 말인가 하면 미술이 등장함으로써 비로소 공예는 공예가 되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예만이 존재하던 시대에는 그것을 공예라고 인식할 수도, 공예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이는 마치 자식이 태어나기 전까지 부모는 부모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음으로써 비로소 부모가 된다. 부모가 자식을 낳지만 일단 자식이 태어나면 부모는 자식에 의해 거꾸로 규정된다. 공예의 역사도 그렇다.
2)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의 등장은 조형예술에서의 혁명적 변화이다. 그것은 조형예술의 일부(회화, 조각, 건축)가 이전의 기술로부터 인문학과 고급문화로 상승함을 의미한다. 르네상스 시대에 등장한 미술은 18~19세기에 이르면 미학적, 제도적으로 완성된다. 참조: 안소니 블런트 지음, 조향순 옮김,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론>, 1990

미술의 등장은 곧 공예의 타자화(他者化) 과정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공예의 자식인 미술이 문화적 권위를 가짐으로써 공예가 상대화되고 열등화 되었던 것이다. 미술이 등장함으로써 공예는 미술의 과거, 미술의 저편이 되었다. 미술이 중심이 되고 공예는 주변이 되었다. 그리하여 18~19세기에 이르면 순수미술(fine art=회화, 조각)과 응용미술(applied art=공예)이라는 형태로 조형예술의 위계 구조가 고착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서구 조형예술의 역사에서 일어난 가장 큰 사건이며 19세기 이후 현재까지도, 그리고 서구를 넘어서 세계 조형예술의 역사에도 직접적이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18~19세기에 일어난 산업화는 조형예술의 역사에서 두 번째로 큰 변화를 일으킨 사건이었다. 산업화로 인한 기계 생산방식의 일반화는 사회 전 분야에 걸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변화는 조형예술에도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표현의 변화이고 또 하나는 생산방식의 변화이다. 먼저 표현의 변화는 전통적인 회화 매체에서 나타났다. 산업화의 산물인 사진의 등장은 이전까지 외부세계의 모방과 재현을 주된 목표로 삼던 회화에 충격을 주고 그 기능을 약화시켰다. 사진에게 현실세계 재현의 역할을 빼앗긴 회화는 새로운 표현방식과 미학을 모색하고 되었고, 그 결과 이른바 추상미술이라고 불리는 ‘현대미술의 혁명’이 일어난 것이다.

산업화는 미술보다 공예에 더 치명적이었다. 산업화란 전통적인 수공업으로부터 근대적인 기계공업으로의 전환이며, 실용조형에서의 그것은 곧 공예로부터 디자인으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디자인은 전통적인 수공 생산 방식이 아닌 기계 생산 과정에서 제품의 형태를 모색하는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다. 이는 19세기 동안에 다양한 시행착오를 거치며 진행되어오다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모던 디자인(modern design)’이라는 패러다임으로 정립되기에 이른다. 1919년에 설립된 독일의 바우하우스는 모던 디자인의 방법론과 모델을 완성하였다.

근대 산업사회3)의 조형으로 등장한 디자인은 공예의 존립에 직접적인 위협이었다. 공예는 점차 설자리를 잃어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공예는 소멸되거나 아니면 변신을 꾀해야 했다. 사진의 위협에 대해 현실 재현이 아닌 추상화라는 방식으로 생존을 모색했던 미술처럼 말이다. 우리가 르네상스나 18~19세기 이전의 공예가 아니라, 근대 조형예술이라는 틀 속에서 공예를 논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근대화 과정3)에서 공예의 변화를 다루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현대공예 이해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조형예술의 역사에서 미술은 공예의 위상을 변화시켰고 디자인은 공예의 생산방식을 위협했다. 이는 공예가 타자화 되고 주변화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조형예술의 근대화 과정을 참조하지 않고서 현대공예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래된 고고학적, 인류학적 개념만으로는 오늘날 공예를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는 것이 바로 그 때문이다. 따라서 현대공예에 대한 인식은 가장 오래된 조형예술로서의 공예에 대한 통시적 이해와 더불어, 미술, 디자인과 함께 근대 조형예술의 삼중구조 내에 배치된 공예의 공시적 위상에 대한 이해라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접근을 필요로 한다.
3) 여기에서 근대화는 1차로는 정신적 근대화로서 르네상스를, 2차로는 사회적·물질적 근대화로서 18~19세기를 생각하면 된다.

근대공예운동의 의의

이야기했듯이, 르네상스의 문화혁명과 18~19세기의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공예의 운명은 크게 변화했다. 공예의 위상은 하락했고 생산은 위기에 처했다. 이처럼 19세기에 오면 공예는 지위와 생산 양면에서 모두 위협을 받기에 이른다. 그러면 이제 공예에게는 오랜 세월 인간의 삶을 담아온 소명을 마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운명만이 남아 있는 것인가. 상당 부분은 그렇게 되었다. 역사는 변화이며 변화에는 언제나 사라지는 것과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있게 마련이니까. 그러한 과정에서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웃겠지만, 역사의 객관적이고 물질적인 과정 자체에 대해서는 뭐라 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공예의 운명에 대해서도 우리는 일단 담담히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수공업의 몰락은 불가피한 것일지 몰라도, 그러한 과정에서 또 많은 문제가 불거져 나온 것도 사실이다. 수공업으로부터 기계공업으로의 전환은 결코 기계적이지만은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생산방식의 전환이 가져온 제품의 질 저하였다. 수공 생산으로부터 기계 생산으로의 전환은 놀라운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지만, 제품의 질은 오히려 낮아지는 역효과를 드러냈던 것이다. 그러니까 산업화 초기에는 비숙련 노동에 의한 기계 생산품의 품질이 오랜 시간 동안 축적되어온 숙련 노동의 산물인 공예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산업의 차원을 넘어서 문화와 예술의 차원으로 옮겨갔고 일부 지식인들에게 이것은 시대적인 위기로 인식되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빅토리아기의 미술 평론가 존 러스킨(John Ruskin, 1819~1900)이다. 아놀드 하우저는 러스킨을 가리켜 “예술적 타락이 사회 전체를 사로잡은 병의 증상으로 여겨진 일은 없었으며, 예술과 생활의 유기적 관계에 대한 의식이 러스킨 이후만큼 분명해진 일도 없었다. 그는 의심할 나위 없이 예술과 취미의 저하를 일반적 문화 위기의 징후로 파악한 최초의 인물이요, 오늘날에도 충분히 인정되지 못한 기초적 원리, 즉 미의 감각과 예술의 이해력이 각성되자면 먼저 사람의 생활 조건이 달라져야 한다는 원리를 발언한 최초의 인물이었다”3)라고 평했다. 여기에서 말하는 예술과 생활의 유기적 관계, 예술과 취미의 저하의 원인이 바로 산업화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러스킨은 사회적 타락은 예술적 타락에 기인하며, 예술적 타락은 바로 예술과 생활의 유기적 관계가 끊어진 것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유기적 관계가 끊어진 것은 바로 생산방식의 변화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근대공예운동(modern craft movement)이 등장하는 배경이 되는 핵심적인 문제의식이다. 그러니까 근대공예운동은 단순히 공예를 옹호하고 기계생산을 부정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설사 근대공예운동이 공예의 존속을 주장했을지라도, 그 이유가 공예 장르의 맹목적인 옹호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근대공예운동의 문제의식과 목표는 제품의 예술적 품질 보존 내지는 향상이었다. 다만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실천적인 방법에는 몇 가지 선택지가 있을 수 있다. 크게는 전통적인 공예를 옹호하고 기계 생산을 부정하는 방법과 새로운 기계 생산방식을 긍정하면서 그 안에서 제품의 품질을 최대한 제고하는 방법이 있다. 근대공예운동이 주로 전자의 노선을 추구한 것이라면 모던 디자인은 후자의 방법을 선택한 것이었다.

1)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 

러스킨의 문제의식을 직접적인 행동으로 실천한 사람은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96)였다. 그가 주도한 ‘미술공예운동(The Arts and Crafts Movement)’은 최초의 근대공예운동이었다. 러스킨의 제자였던 모리스는 19세기의 산업화 과정에서 공예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기 위해서 모리스는 가장 먼저 예술 개념을 재정의했다. 모리스는 러스킨을 따라서 예술을 ‘노동하는 과정에서의 기쁨’이라고 정의했다. 이는 르네상스 이래 정립된 인문주의적 예술 개념을 뒤집는 것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의 예술 개념은 한마디로 탁월한 개인(천재)에 의해 창조된 정신적 산물을 의미했다. 이러한 예술 개념은 두 가지 조건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는 예술 창조의 주체, 즉 ‘천재’로 일컬어지는 탁월한 개인이고, 둘째는 하나의 완결되고 통합된 창조물인 작품(work of art)이다.

 

▲ 윌리엄 모리스

모리스는 이러한 예술 개념을 완전히 전복시킨다. 첫째는 예술 창조의 주체를 위대한 예술가가 아니라 평범한 장인으로 규정했다. 둘째는 예술을 산물이 아니라 (노동의) 경험으로 대체했다. 그러니까 모리스는 평범한 인간 또는 장인이 물건을 만드는 과정에서 느끼는 기쁨을 예술이라고 본 것이다. 이는 예술 개념의 혁명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모리스에게 예술가란 장인과 동일한 존재였다. ‘장인으로서의 예술가(Artiste Artisan)’, ‘예술가로서의 장인(Artisan Artiste)’이라는 그의 언명이 이를 증명한다. 예술을 경험으로 본 것도 놀라운 발상의 전환이다. 이것은 그가 예술을 삶의 과정으로 보았음을 의미한다. 물

론 이것은 현대의 ‘과정예술(process art)’과는 다른 것으로서, 르네상스 이후 삶으로부터 멀어진 예술을 다시 인간의 삶 속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의도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재구성된 예술 개념 속에서, 모리스는 ‘예술의 민주화’와 ‘예술의 생활화’를 주장했고, 바로 그것을 가능하게 할 매체를 공예에서 찾았던 것이다. 물론 그의 실천이 반드시 이념과 일치했던 것은 아니다. 아놀드 하우저는 모리스의 실천상의 모순을 세 가지 지적하기도 했다.5) 하지만 모리스에 의해 18~19세기에 정착된 순수미술과 응용미술, 고급미술과 저급미술이라는 계급차별적 이분법이 적어도 개념적인 차원에서 해체되었음은 분명하다. 이처럼 고전적 인문주의에 기반 한 예술 개념의 해체 없이 근대공예운동은 물론이고 모던 디자인의 등장도 불가능했다. 서구의 모던 디자인은 전통적인 조형예술의 층(層) 구조를 해체한 위에서 등장한 20세기의 새롭고 민주적인 조형적 실천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근대공예운동이 20세기 디자인의 정신적 뿌리가 된 것이야말로 조형예술 역사의 역설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6)
5) 아놀드 하우저는 모리스의 모순을 복고주의, 기계에 대한 몰이해 외에도 실천에 있어서의 엘리트적 성격을 든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현대편> 117쪽 참조. 6) 최초의 디자인사 저술로 꼽히는 니콜라우스 펩스너의 <모던 디자인의 선구자들>(1936)의 부제가 ‘윌리엄 모리스에서 발터 그로피우스까지’인 것으로 보더라도 모리스가 모던 디자인의 정신적 뿌리임을 확인할 수 있다. 

 


2)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운동

서양에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이 있었다면 동양에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89~1961)의 ‘민예운동(民藝運動)’이 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동양 또는 일본의 윌리엄 모리스라고 불러야 할 인물로서 역시 동아시아의 근대화 과정에서 공예의 가치와 가능성을 재정립한 인물이라고 보아야 한다. 야나기 역시 산업화되어가는 일본의 현실에서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공예의 가치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를 모색하였다. 중국을 대신하여 동아시아의 새로운 패자로 등장한 일본의 엘리트로서, 일본만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전통을 어떻게 근대화할 것인가는 매우 주체적인 고민이고 문제의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근대화는 한편으로는 서구 근대문명의 번역을 통해, 다른 한편으로는 동아시아의 전통문화의 재해석과 전유(專有)라는 이중적인 과제를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야나기의 역할은 후자에 속한다.


▲ 나기 무네요시


야나기는 동아시아 전통공예의 핵심을 ‘민예(民藝)’에서 찾았다. 민예는 ‘민중적 공예’의 약어로서 야나기 자신이 만든 말이다. 야나기는 공예를 ‘귀족적 공예’와 ‘민중적 공예’로 구분하였는데, 이중에서 민중적 공예(민예)를 동아시아 전통공예의 중심으로 보고 이를 근대화 과정에서 어떻게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는 일본이 민중공예를 동아시아 근대공예의 중심에 놓음으로써,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귀족공예를 대표하는 중국과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포지션을 보여준 것이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야나기의 공예관에는 중세적 민중주의가 근대적 민주주의와 오버랩 되어 있는데, 이는 윌리엄 모리스와 마찬가지이다. 이 또한 전통공예로부터 디자인으로 이행되어가는 시기의 과도기적 성격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야나기가 주장한 민예의 대표적인 모델이 바로 조선 공예였음은 잘 알려져 있다. 다시 말해서 야나기는 조선 공예를 대표로 하는 일본, 오키나와, 대만, 중국 등지의 전통공예를 동아시아의 근대가 어떻게 계승, 발전시킬 것인가 하는 것을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야나기의 해법은 개인 공예가와 ‘협단(協團)’이었다. 다시 말해서 근대화로 인해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공예 조직이 붕괴된 상태에서 새로운 공예 조직을 개인 공예가를 중심으로 한 협단에서 찾았던 것이다. 야나기는 근대 공예가는 전통적인 익명의 장인이 아니라 개인 공예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다만 그 개인 공예가가 순수미술을 추구하는 공예미술가가 아닌 새로운 민중공예가(민예작가)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러한 민중공예가들이 협단을 이루어 근대의 민예를 생산해야 한다고 보았다.7)

7)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버나르 리치 엮음, 이대일 옮김, <공예가의 길>, 미진사, 1988. 참조

야나기의 민예운동은 당시 일본에서 대단한 반응을 불러일으키며 활발히 추진되었다. 도쿄에 ‘일본민예관’이 설립되고 일본 전역에 지역 민예단체가 조직되기도 했다. 이는 마치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에 당시의 많은 예술가들이 호응하며 동참한 것을 방불하게 한다. 말했듯이, 야나기의 문제의식도 모리스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 결국 근대공예운동은 산업화되어가는 현실에서 어떻게 전통적인 공예의 가치와 의미를 확인하고 계승할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근대공예운동이 반드시 전통적인 수공예를 고집하고 지키는 것으로 결과한 것만은 아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모리스가 모던 디자인 운동의 선구자로 이해되는 것처럼, 근대공예운동은 공예로부터 디자인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발판이 되어준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야나기의 민예운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단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전통 민예를 보존하는 것을 넘어서 일본 모던 디자인에 하나의 철학을 제공해준 역할을 하였다. 어떻게 보면 근대공예운동의 최대 성과는 공예 자체가 아니라 디자인에서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역시 공예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맞닿아 있다. 공예를 단지 전통적인 형태 자체로 보지 않고 하나의 가치로 본다면, 근대공예운동은 그러한 가치를 산업사회에서 보존하고 되살리는 방식으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설사 그 결과가 공예의 죽음과 디자인의 탄생으로 귀결되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아무튼 근대공예운동은 양(洋)의 동서(東西)에서 각기 시간차는 있지만 공예의 근대적 이행과정에서 부딪힌 문제를 탐색하고 해결하려는 과정에서 등장한 과도기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노력이었다. 그러니까 현대의 조형예술은 르네상스의 문화혁명이 산출한 조형예술의 위계구조와 19세기의 산업혁명이 강제한 조형예술 생산의 변화가 낳은 충격을 나름대로 흡수하면서 새로운 조형예술의 질서를 주조해보려고 시도했던 근대공예운동의 노력을 배제하고는 제대로 인식할 수가 없다. 현대의 조형예술과 공예는 바로 그러한 근대공예운동의 노력과 성과 위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공예의 상황

이상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르네상스와 산업화, 그리고 공예 가치의 재인식을 시도한 근대공예운동의 역사를 거쳐 온 오늘날 현대공예의 상황은 어떠한가. 말했다시피 현대공예는 바로 저러한 공예의 통시적 과정이 결과한 공예의 역사적 현실태인 것이다. 특히 오늘날 21세기의 공예 상황은 19세기나 20세기와도 다르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지속적인 산업혁명의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김태유와 김연배는 산업혁명이 1차에서부터 4차에 이르기까지 계기적으로 발생한다고 말한다.8)
8) 김태유·김연배, <한국의 시간>, 쌤앤파커스, 2021. 참조

산업혁명 이전의 산물인 공예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끊임없이 자신의 위상을 재조정해야만 했다. 공예에게 근대화는 한편으로는 도태의 위기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기회의 계기가 되기도 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공예는 소멸하지 않는다. 공예는 가장 자연적이자 인간친화적인 매체로서 원초적인 생명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재인식하고 재구성할 뿐이다. 여기에는 대단히 흥미로운 역설적 진리가 존재한다.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고, 오래된 것을 새것으로 변모시키는 것이야말로 공예를 살아 있게 만드는 생명의 기술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가장 오래되고 낡고 연약하고 무딘 공예야말로 조형예술의 어떠한 장르보다도 더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크고 강한 것이 아닌 작고 약한 공예에서 오히려 그런 역설적인 힘과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4차 산업혁명이 운위되는 오늘날 그런 점은 상대적으로 더욱 부각되고 있다. 공예의 미래는 바로 이러한 조건 속에 있다. 그런 점에서 공예야말로 가장 오래된 예술이면서 동시에 가장 새로운 예술일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최범 : 지난 30년간 공예, 디자인, 미술 등 여러 시각예술 분야에 걸쳐 평론활동을 펴왔다. 전문매체와 일간지 등에 다양한 글을 기고해왔으며, 지금까지 7권의 공예와 디자인 평론집 그리고 2종의 디자인 교양서를 출판한 바 있다.

※ 이 글은 (재)예술경영지원센터에서 주관한 <2021 시각예술 비평가-매체 매칭 지원사업 - '다시, 바로, 함께, 한국미술'> 프로젝트에 의해 기고된 글입니다. 두 번째 글은 9월 30일에 게재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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