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예는 정서를 담은 사물

칼럼 / 편집부 / 2019-11-24 21:3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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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예이론의 과도한 개입
현대공예의 오류
곤고한 처지의 공예
새로운 인식 필요

 

 

로에베 1회 수상자인 에른스트 갬벌의 작품

 

'공예계는 이론과 평론이 부족해 발전이 없다' 주장에 대한 의견이 야기되고 있다.  


우리 공예의 불행은 정부가 공예가들에게 서열식, 관리식 완장을 채워주면서 부터다. 제도가 일정 부분 전통공예가를 보호하는 장치로서 긍정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우리 공예의 기형적 성장은, 완장을 찬 공예가의 어깨에 과도한 힘이 실렸고 그 힘의 논리에 정당성을 더하려다보니 무리한 이론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런 추세는 지금까지 공예계 전반에 완연하게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공예 이론이 문제되는 이유는 뭘까? 서점에 공예 이론(평론)서가 희박하고 있다손 치더라도 번역물이 대부분이다. 공예 이론가의 명명도 열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한다. 그러다보니 다른 장르에서 쉽게 공예 담장을 넘어와 입질하거나, 아니면 공예가 스스로가 이론가가 되어 형편에 맞지 않는 주의, 주장을 펴놓는 게 공예 이론의 전부다.

미술에서도 전시장 입구의 글과 작품이 별개로 존재하고, 영화 제작과 평론이 겹치지 않은지 오래 전이다. 그렇다면 공예계는 왜 문제가 될까? 이에 대한 대답을 내리기 전에 공예의 정체성을 먼저 언급해야 한다.

먼저 공예, 공예가, 공예예술가, 전통공예, 현대공예, 공예디자인, 공예아트, 공예산업, 공예품 등 정리되지 않은 공예 언어가 기회주의적으로 쓰이는 것부터가 공예의 또다른 불행의 표식이다. 자기 정체성이 없다는 말이다.

모든 공예인들이 필독한다는 리처드 세넷의 <장인>도 결코 공예 전반이 아닌 공예의 일정한 부분에 대한 해석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지금의 공예 범주다.

공예가 어려운 것은 산업화의 억압에 한동안 짓눌려 있다가 다시 자리를 잡는 과정에서, 이미 중세 때부터 자리매김한 예술과 산업에서 태생해 자기 걸음을 걷고 있는 디자인이라는 공고한 범주의, 경계와 사이에서 이리저리 쏠리는 어설픈 태도가 진짜 문제라 할 수 있다. ‘자연 재료를 숙련된 기능에 손으로 만들어야 공예’라는 낡은 주장으로는 다양성 사회에서는 도태되기 십상이다.
 

최근에 전시가 끝난 ‘청주공예비엔날래’를 채운 전시품을 보더라도, 공예, 예술, 디자인, 산업을 망라한 종합세트가 아니었던가? 그 공예전은 누가 주관하는가? 결국은 중앙 정부, 지방자치 산하단체, 학계 순이고 순수한 공예가는 그 밥상에 얹히는 형편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도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공예, 공예가는 점점 몰락해 가는데 공예 잔치는 성대해지고 있다. 8일부터 열리는 '2019 공예트렌드페어' 국제심포지엄에 우리 공예의 자리는 보이지 않는다.

좀 좁혀서 정리하자면, 사물의 동선에는 이론으로 포장된 말과 그 말에 대한 말이 필연적으로 따른다. 그렇다고 이를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다. 그저 공예가는 자신이 만들고 싶은 사물을, 정성을 다하면 그만이다. 많이 팔고 싶으면 적절한 값을 매기면 될 것이고, 높은 값을 받고 싶으면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된다. 모든 건 만드는 사람의 몫이다. 다른 장르의 경계에서 우물쭈물 하지만 않으면 된다.

개인적 견해를 말하라면, 세계문화유산인 경주 석굴암 본존불 아래에 서서 몸을 떨었던 경험이 지금까지 공예를 판단하는 모든 기준이다. 돌을 조각한 것인데, 감히 형언할 수 없는 경외감에 싸여 한 동안 움직일 수 없었던 그 무덤덤한 체험과 이 불상을 만든 석공에 대한 한없는 존경심이다. 혼을 담은 사물이야말로 미술, 디자인, 예술, 이론, 평론 등을 초월한다. 지식에서, 이론에서, 정보에서 멀어져야 참공예가 보인다.

공예는 현대인에게 '정서'로 치환되어야 한다. 그래야 산업, 디자인, 미술, 예술과의 비교 혹은 경쟁에서 벗어날 수 있다. 쓰임 기능과 가격은 공산품을 이길 수 없고, 브랜드를 지향해 봤자, 디자인의 힘을 넘을 수 없다. 조선의 가구를 재현하면서 쓰임이나 기술, 재료에 얽매이면 완벽하게 실패한다. 이미 현대 소비자는 그 경계를 지난 지 오래다.

지금의 공예가 과도한 이론에 휘둘린다는 논쟁 이전에, 요즘 공예 자체가 번쩍이는 수갑을 채우는 억압적 사물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너무 과하다. 아마도 쓰임과 예술이라는 두 왕관을 모두 가지려는 이기적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무슨 생각으로, 어떤 기술로, 몇 년의 경력으로 만들었던 ‘정서’를 담지 못한 공예는, 사물은 앞으로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모든 장르를 초월한 도(道)의 길목에서 진짜 공예를 만나고 싶다.

 

글: 육상수(우드플래닛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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