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 정원,Trylletromler : 공원으로 떠나는 도시인의 모험

공간 / 송은정 기자 / 2020-02-29 21:01:20
  • -
  • +
  • 인쇄
시민들의 휴식처 로젠보르 궁전
왕의 정원(Kongens have)
2967개의 스프루스 각재의 불규칙한 패턴
숲을 누비는 뱀의 모습
미로를 탐사하는 듯한 기분

 

물결치는 나무 울타리의 안과 밖을 미끄러지듯 넘나들며 아이들이 뛰어논다. 젊은 커플은 서로의 허리를 꼭 끌어안은 채로 자신들의 이 애틋한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그 사이로 짧은 스포츠웨어를 입은 중년 남성이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로 무심히 달려간다. 끊어질 듯 다시 또 이어지는 308m의 미로 속에서 펼쳐지는 수백 가지 장면들이다. 


유럽의 여느 도시의 공원이 그러하듯 덴마크 코페하겐의 중심에 자리한 17세기 로젠보르 궁전의 정원은 시민들의 휴식처로 활발히 이용되고 있다. ‘왕의 정원(Kongens have)’이라는 위풍당당한 별칭 때문일까, 한 해에만 250만 명의 사람들이 찾아들 만큼 인기 있다. 르네상스풍으로 꾸며진 이곳은 덴마크에서 가장 오래된 조경 디자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사각형과 삼각형, 선과 원 등 완벽한 형태로 여겨졌던 형상이 적용된 정원은 미로와 대각선 길과 같은 바로크식 요소가 추가된 것 외에는 별다른 변형 없이 지금까지 유지되어 왔다. 그리고 지난해, 이곳에 새로운 변화가 찾아 들었다. 네덜란드의 디자인 회사 파브리크(FABRIC)가 왕의 정원에서 발칙한 장난 하나를 부렸다. 우리의 일상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줄 거대한 장난감 ‘트릴레트로믈러(Trylletromler)’다.  

 

 

 


2967개의 스프루스로 지어진 울타리


‘조이트로프(Zoetrope)’라고 불리는 19세기의 회전식 장난감에서 영감을 받은 트릴레트로믈러는 조이트로프의 덴마크어 표현이다. 낯선 이름이지만 어릴 적 한번쯤은 접해보았을 친숙한 놀이도구다. 가만히 멈춰 서 있던 조랑말이 뱅그르르 돌기 시작한 원통과 함께 맹렬히 달리는 신기한 광경에 몇 번이고 다시 회전시켜보았던 기억 속의 그것이다. 

 

원통의 둘레를 따라 이어 붙인 연속적인 이미지를 얇은 틈새를 통해 바라보게 함으로써 착시효과를 일으키는 방식으로, 분절되어 있던 각각의 정지된 장면이 하나로 연결되면서 새로운 영상을 만들어낸다. 무려 2967개의 스프루스 각재를 불규칙한 패턴으로 이어붙인 트릴레트로믈러 또한 동일한 방식이 적용됐다. 

 

 

설치물을 따라 걷거나 혹은 기대어 앉아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은 38mm 두께의 각재 사이로 언뜻 언뜻 스치면서 새롭게 다가온다. 틈새 너머의 사물은 마치 잘게 쪼개져 있는 모자이크 작품과 같이 수많은 직사각형의 조합으로 재구성되어 우리에게 비춰지는 것이다. 


정원 가까이의 로젠보르 궁전에서 내려다본 설치물은 마치 종횡무진 숲을 누비는 뱀의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산책길의 양쪽으로 늘어선 가로수길, 다져진 흙바닥,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벤치로 연상되는 정원 디자인의 전형적인 광경을 보란 듯이 흩트려 놓으려는 심산으로 느껴질 정도다. “엄격한 규칙 아래 짜인 정원 설계에 질문을 던짐으로써 새로운 방식의 즐거움을 만들어내고 싶었다.”라는 디자이너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편, 약 7cm 너비의 얇은 각재를 세운 설치물은 울타리의 모습과 닮아 있다. 으레 울타리라면 바깥의 위험으로부터 내부를 보호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공간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지만 트릴레트로믈러는 그 고유의 성격을 완전히 해체했다. 띄엄띄엄 발견할 수 있는 타원 혹은 반원의 입구를 통해 사람들이 공간을 이동할 수 있도록 했지만, 실제로 우리가 오갔다고 생각한 ‘안과 밖’의 경계는 거의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착각은 불편함을 유발시키는 대신, 오히려 공간을 입체적으로 느낄 수 있도록 돕는 효과를 가져다준다. 앞서 언급한 입구들은 구불구불한 미로로 빠져들기 위한 시작점이자 출구다. 이러한 입구는 한눈에 바로 들어오는 위치가 아닌 굴곡의 깊은 안쪽 면이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곳에 의도적으로 만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미로를 탐사하는 듯한 기분이 들도록 만든다. 

 

 

 

일출부터 일몰까지 왕의 정원의 개방시간 동안 트릴레트로믈러는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한눈에 담기 어려운 이 거대한 설치물 주변을 처음에는 그저 배회했다가, 이내 호기심에 이끌려 제 발로 미로 속을 헤매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이곳을 놀이터로 인식하고 주저 없이 뛰어 든다. 

 

 

우리의 공원은 어떤가. ‘밟지 마세요’라는 팻말을 잔디에 보란 듯이 꽂아 둠으로써 방문객의 행위를 완벽하게 제한시키는 것이 다반사다. 잔디밭 건너편의 벤치에 앉아 유명 조각가의 설치 미술품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이제 지루하다. 새로운 체험이 필요하다.

 

사진 Walter Herfst

 

[저작권자ⓒ 우드플래닛 뉴스 프레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독자의견]

댓글쓰기

- 띄어 쓰기를 포함하여 250자 이내로 써주세요.
- 건전한 토론문화를 위해,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욕설/비방/허위/명예훼손/도배 등의 댓글은 표시가 제한됩니다.


WOODPLANET Newsletter

우드플래닛 최신기사, 관련정보 등을 이메일로 받아 보실 수 있는 서비스입니다.

개인정보 수집 및 이용에 동의 하시겠습니까?

우드플래닛은 개인정보보호법 등 관련 법령에 의거하여, 개인정보를 수집·이용함에 있어 정보주체로부터의 이용 동의 여부를 사전에 고지하고 있습니다. 정보주체가 되는 이용자께서는 아래 내용을 확인하시고, 동의 여부를 결정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ㆍ수집 이용 목적 : 우드플래닛과 구독자를 위한 의사소통 경로 확보

ㆍ수집하는 개인정보의 항목 : 이메일

ㆍ보유 및 이용 기간 : 메일링서비스 해지시 까지(해지시 정보파기)

뉴스레터에 등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