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구전이 아닌 조용무전

Furniture / 육상수 기자 / 2018-04-21 17:0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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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월 말에 끝난 조용무 작가의 전시명은 ‘조용무 전’이다. 가구전이지만 가구를 말하기보다 작가 자신을 말하고자 했다. 성급히 결론을 내리자면 가구는 조용무를 이해하는 혹은 표현하는 도구다. 그렇다면 이번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이 선과 면이 빗나간 그의 가구에 의문을 가졌다 해도, 그것에 대한 설명을 듣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가구는 일상의 도구다. 만든 이가 아니라 쓰는 사람에 의해 가치가 결정된다. 좀 더 편하고 보기 좋을 수는 있지만 특별한 개념을 즐기기 위해 가구를 구매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가구도 아티스트, 공예가 혹은 특출한 디자이너에 의해 귀한 대접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가구가 온전히 작가 스스로의 삶에 대한 해법의 표현 도구로 소비되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런 점에서 조용무의 가구전은 특별하다.

 


조용무 작가는 늘 자유 의지로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그는 사람과의 인연, 사회적 관계에 대해 지속적인 알레르기를 앓아왔다. 혹자는 누구나 살아가는 틀인데 뭘 그리 까다로운가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것이야말로 경계할 태도다. ‘고독’은 관계성의 억압이 낳은 언어이다. 자기중심을 상실했거나 표류하고 있는 자들을 위한 위로나 도피의 대체어가 바로 ‘고독’이다. 조용무는 그 ‘고독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의 하나로 가구를 택했다.

 


그의 가구가 선과 면이 어긋나 어색한 표정을 짓는 이유는, 오로지 조용무 작가의 불완전한 삶, 더 잘 살아보려는 충돌과 반동의 결과다. 그래서 일상적 가구로서의 역할과 기능은 처음부터 산화된 채 우리에게 온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근거를 알 리가 없는 관람객에게 전시장의 가구는 기능성을 찾아가는 디자인 가구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이번 전시의 운명이다. 우리 가구계가 자신만의 가구로 개인전을 갖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만큼 가구의 인식 체계가 도구성에 제한되어 있다. 제작과 관리가 어렵다는 사실의 반증이기도 하다. 때문에 가구 ‘개인전’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주목을 받을 만 하다.

  

 

조영무의 첫 고독은 불균형한 가구로 마무리했다. 전시는 치유의 결과가 아니라 조용무의 통증 그 자체며 자신에게 당당하고 싶은 근원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낸 전시다. 이쯤 되면 조용무의 타이틀을 목수, 디자이너가 아니라 작가라고 불러도 좋다. 불완전을 완전함으로 착각하고 살아가는 대중에게, 만들어진 인격의 부조리를 해체하도록 유도하는 이를 작가라고 부른다면, 조용무도 그 범주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전시장을 찾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구전의 가구를 보러왔을 것이다. 관객들이 그의 가구의 면면을 훑어보며 따지는 시간에, 작가는 자신의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낸 알몸처럼 몹시 부끄러워하며 더 고독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조용무를 좀 더 이해하기위해 그의 비빌 작업노트를 펼쳐 보았다.

타인의 의식, 의견, 고민을 너무 의식하지 마라. 싹 빼고 나면 결국 ‘나’ 만 남는 것을. 나에게 천착할 수록 밖에 있는 것이 더 잘 보일 것이다. 고집을 부려라.(2015년 12월 15일. 조용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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