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목수 천철석의 목수 인생

Furniture / 장상길 기자 / 2018-04-02 17: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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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완주는, 적어도 내게는, 목수의 고장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소목장을 셋씩이나 배출한 고장이라 그렇다. 소병진, 조석진(2013년 작고), 천철석 소목장이 그 주인공들이다. 10대에 목수의 길에 들어서 농방을 거치며 목수 실력을 쌓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무형문화재가 된 이력이 비슷하고, 우리의 전통가구를 되살리고 그 가치를 전승하는 것을 업으로 삼으며 40여년을 우직하게 목수로 살아온 것도 이들의 공통점이다.

 

 

40년이 넘는 세월을 목수로 살아온 삶이라니! 그 삶 속에서 목수들이 스스로의 몸과 마음에 새겼을 세월의 나이테가 궁금했다. 그렇게 호남평야의 젖줄인 동진강과 만경강 사이, 모악산 자락 완주군 두이면을 찾았다. 천철석 소목장이 운영하는 장인공방이 그곳에 있다.


생업으로 시작한 목수의 길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목가구 소목장 보유자 천철석

 

초등학교 시절 축구를 했던 천철석 소목장은 귀한 아들이었다. 내리 여섯이나 딸을 놓고 일곱 번째 가서야 간신히 본 아들이었다. 하지만 그 귀한 아들이었건만 천 소목장은 축구를 할 수 없었다. 가난이 죄였다. 축구선수의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천 소목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직업을 구하기 위해 무작정 전주로 나갔다. 1971년, 그의 나이 고작 열세 살에 불과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렇게 전주를 쏘다니던 천 소목장의 눈에 문짝을 짜던 한 목수의 작업 광경이 들어왔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광경은 오래도록 천 소목장의 시선을 붙잡았다. 한참을 바라보던 천 소목장은 저 일이라면 평생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가 등을 떠민 것도 아니었고, 누가 손을 잡아 이끌어준 것도 아니었다. 그저 끌렸다. 뜻을 세우니 길은 금새 열렸다. 마침 농방(주로 농을 짜던 공방)에서 목수 기술을 배우던 선배의 소개로 동서학동에 있었던 서라벌공예사에 취직을 했다.


당시는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주택 개량사업이 전국적으로 펼쳐지면서 가구 수요가 급증하던 터라 농방 경기가 좋았다. 목수 기술을 배우려고 농방을 찾아오는 이도 많았다. 누구 하나 친절하게 기술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천 소목장은 그 틈바구니에서 시키는 일은 뭐든 했다. 사소한 실수에도 망치가 날아오기 일쑤였지만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천 소목장이 손에 쥔 첫 월급은 단돈 1000원이었다. 워낙 성실하고, 일머리도 좋았던 천 소목장은 당시 서라벌공예사 사장이었던 김춘태 씨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그렇게 6년을 견디고 나니 제법 기술이 쌓였고, 오라는 데도 많았다. 목수의 길에 들어선 지 10년이 가까워질 무렵에는 소규모 가구공장을 통째로 맡아서 하는 ‘대마’를 해서 돈도 제법 벌며 호시절을 보냈다.

 

 

▲ 전주애기장┃참죽나무, 먹감나무, 오동나무

▲ 전주이층장┃760×1015×390┃느티나무, 홍송, 오동나무, 먹감나무

 


그런데 천 소목장은 늘 아쉬웠다. 목수로서 뭔가 가치 있는 일을 성취해보고 싶다는 도전의식이 늘 잠재해 있던 탓이었다. 천 소목장은 1980년 벌이가 좋았던 대마 일을 뒤로 하고 1975년 우리나라 최초로 국제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조석진 소목장(1998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19호 목가구 소목장 보유자 지정)을 찾아갔다.


“기왕 목수를 하는 거면 기능대회에서 한번 제대로 실력 발휘를 한번 해보고 싶었어요. 주변에서도 기능대회를 참가를 권유하더군요. 조석진 선생은 당시 팔복동에서 동생과 함께 명장공예사란 공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국제기능대회에서 금메달을 딴 기술이 배우고 싶어 찾아갔던 거죠.”


그렇게 조석진 소목장을 찾아간 천 소목장은 직원으로 근무하면서 일과 기능대회 준비를 병행했다. 대마 일을 할 때와 비교하면 수입도 1/10로 줄었고, 아침 7시에 출근해 하루종일 일을 하고 저녁 9시에 퇴근하면 그때부터 도면 공부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기능대회 준비를 해야 하는 고된 생활이 이어졌지만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천 소목장에겐 그마저도 즐거웠다. 새로운 경지를 터득하는 재미는 그 무엇과도 바꾸기 힘든 희열이었다. 그런 준비 끝에 천 소목장은 1980년 전북기능경기대회 은상을 시작으로 1981년에는 전국기능대회에 나가 은상을 받았으며, 1983년에는 전북지방기능경기에서 드디어 금상을 품에 안았다.

 

1997년과 1998년에는 대한민국전승공예전에 작품을 출품해 입선의 영광도 안았다. 초등학교를 갓 졸업하고 목수 일을 시작해 목수로서 보다 높은 성취를 이루고자 밤낮없이 도전하고 달려왔던 그 사이 활황이었던 농방은 유통망과 가격경쟁력을 갖춘 대형 가구회사에 밀려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전국에 산재했던 농방들도 하나 둘 문을 닫았다. 천 소목장은 목수로서 보다 높은 성취를 하나 둘 이뤄가며 한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고 자식 셋을 낳았다. 목수로서,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늘 거침이 없었고 두려울 것도 없었던 삶이었다.

 

조선가구를 만나다




천철석 소목장은 2000년 새로운 도전을 위해 조석진 소목장의 품을 떠나 따로 공방을 차렸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도전은 바로 ‘전통의 계승’이었다.
“완상동 골동품 거리를 지나다가 고가구를 보면 이상하게 끌렸어요. 저 좋은 걸 왜 아무도 안 할까 하는 의문도 생겼죠. 아무도 안 하니까 나라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시작이었어요. 버려진 고가구가 눈에 띄면 바로 주워 와서 뜯어보면서 전통가구의 짜맞춤 원리를 하나 둘 터득하니 이전까지 제가 만들었던 가구와는 전혀 다른 신세계가 열리더군요. 공방을 차린 것도 전통가구를 한번 제대로 만들어보기 위해서였죠.”
천 소목장은 그렇게 전통 조선가구와 연을 맺기 시작했다. 조선가구 중에서도 그가 빠져든 것은 전주장이었다.


“한 손님이 여닫이와 반닫이가 한데 쓰인 장을 들고 와 수리를 맡겼어요. 디자인도 독특하고 이전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 물어보니 전주장이라더군요. 전주장은 18세기 들어 전주 양반가에서 쓰이던 가구인데, 단박에 빠져들었죠. 새로운 길을 찾은 거예요. 그때부터 전주장 재현을 위해 뛰어다니기 시작했어요. 전주장은 재료가 중요해요. 마음에 드는 나무를 고르고 고른 다음 켜고 자르고 대패질해서 하나 둘 맞춰가는 쾌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어요.”

 


어디 배울 스승이 없었고, 마땅한 자료도 없이 천 소목장은 하나에서 열까지 혼자서 원리를 깨우치는 수밖에 없었다. 아교와 부레풀을 쓸 데가 다르다는 것도 시행착오를 겪으며 터득했고, 인두로 나무를 지져서 태우는 낙동법은 얘기를 전해 듣고 이것저것 실험을 해가며 방법을 찾았다. 그렇게 전주장이라는 새로운 목수의 세계를 여행하는 천 소목장 본인은 더할나위 없이 즐거운 나날이었지만 전통가구에 빠져들면 들수록 한편으론 고난이 깊어졌다. 바로 생활고가 찾아왔다.


“전주장 재현에 매달리면서 생활이 어려웠어요. 1년을 전주에서 공방 문을 열었다가 도저히 안 되겠어 문을 닫고 집을 수리해 집 한켠에다 공방을 차렸어요. 월세 걱정은 덜었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었어요. 그 덕에 집사람이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완주군 두이면으로 공방을 옮긴 후엔 동네 사람들이 가져오는 가구를 수리하는 게 거의 유일한 돈벌이였지만 그마저도 수리비를 마다하고 막걸리 한잔 얻어 마시는 게 다반사였으니 수입이라곤 전무한 형편이었다. 가장으로서는 면목이 없었지만 천 소목장은 새로운 도전을 포기할 수 없었다. 단전이나 단수 경고장이 날아들면 천 소목장은 더욱 이를 악물고 전주장 재현에 몰두했다. 전주장의 원형을 찾아 천 소목장은 어디든 한달음에 달려갔다. 부인도 그런 남편을 보며 더 이상은 돈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공방에 파묻혀서 보낸 세월이 어느덧 15년을 훌쩍 넘었다. 그 사이 전주장을 비롯해 새로이 재현 작업을 시작한 남원장까지 더해져 공방에는 조선가구가 켜켜이 쌓여갔다. 하지만 찾는 사람이 없었다. 가구가 팔리지 않으니 살림은 더욱 궁핍해졌다. 그럴수록 천 소목장의 열정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이 일을 놓을 수 없는 건 누군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라고 왜 돈이 싫겠어요. 왜 번뇌가 없었겠어요. 그런데 돈 생각하면 이거 못해요. 제가 만든 전주장을 보면, 또 제가 앞으로 재현하고 계승해야 할 우리의 전통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어요. 운명일지도 모르죠. 전주장을 재현하면서 제가 깨달은 건 욕심을 내려놓고 순리대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는 거예요.”


‘전주장’의 최고봉이 되다

 

 

▲ 장문갑┃1060×300×220┃참죽나무, 먹감나무, 오동나무
▲ 장문갑┃1060×300×220┃참죽나무, 먹감나무, 오동나무

 


천 소목장은 지난 2014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목가구 소목장 보유자’로 인정됐다. 전통 재현이라는 가치를 좇아 한결같이 걸어온 목수의 삶이 인정받은 것이다. 천 소목장은 6년째 매주 월요일 전주교도소에 나가 재소자 제자들에게 목수로서의 지혜를 나눠주고 있으며 전주공업고등학교에서는 어린 제자들에게 목수로서의 경륜을 나눠주고 있다.


“제가 목수 일을 배울 때는 남한테 자기 기술을 가르치는 것에 인색했어요. 그러니 어깨 너머로 배우고, 혼자서 연구하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길을 돌아가야 했죠. 그러니 얼마나 힘들어요. 그걸 왜 아까워하고 감추려고 하는지 모르겠어요. 잘 가르치고 그걸 배운 제자들이 꽃을 피우면 그게 곧 가르친 사람의 영광이 될 텐데 말이죠. 그래서 저는 제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눠주고 싶어요. 제 다음에는 누군가는 맥을 이어야 하잖아요.”
천 소목장은 전통의 가치를 바로 볼 줄 아는 후배들을 키우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전주교도소에서 인연을 맺은 제자와는 출소 후에도 연락을 주고받으며 물심양면 도움을 주고 있다. 김제, 고창 등 각지에서 공방으로 찾아오는 제자들도 많다. 단국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현재 조교로 근무하고 있는 천 소목장의 큰딸도 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다며 시간을 내서 나무 공부를 하고 있다니 목수로 살아오면서 ‘돈복’은 놓쳤을지 몰라도 ‘제자복’만큼은 남부러울 게 없어 보인다.

 

 

▲ 전수자를 키운다는 희망으로 고등학생들에게 조선의 가구를 가르치고 있다.

“저는 아직까지도 제가 스스로 만족한 가구를 만들지 못했어요. 늘 아쉬움이 남고, 보완해야 될 점이 보여요. 40년을 목수로 살아왔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늘 지금부터가 목수 인생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아직 배울 것도 많고요.”

 


천철석 목수는 전주장이나 남원장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북장을 비롯해 각 지역에서 맥이 끊긴 조선가구를 발굴해 재현 작업에 남은 목수 인생을 헌신하고 싶다고 말한다. 목수를 꿈꾸던 열세 살 소년의 꿈이 수많은 나이테를 그리며 지금에 이르렀듯 앞으로도 그는 목수의 나이테를 그리며 조선가구의 아름다움을 되살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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