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이브 카페 ‘빙고’: 빙고(氷庫)에는 얼음이 없다

Architecture / 김은지 기자 / 2018-04-12 17: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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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폐기한 공간들이 있다. 얼음 창고, 탄광, 전분 공장 같은 곳들. 집집마다 냉장고가 있는 2018년에 얼음 창고가 웬 말이냐 싶겠지만 90년 전 이곳은 마포나루터에서 얼음을 싣고 와 보관하던 빙고(氷庫)였다. 그리고 지금은 얼음 대신 한 건축가의 꿈을 담은 카페, 빙고(Bingo)다.

 

크게 번성했다가 급격히 쇠퇴한 도시에는 버려진 공간들이 유물처럼 남는다. 국내 최대의 개항지로 서울보다 번화했던 인천, 1970년대 탄광 산업으로 절정을 맞이했던 정선이 대표적인 예이다. 도시의 쇠락과 함께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사람의 손길이 떠난 건물은 그대로 쓸모를 잃고 죽어가는 것이다. 빙고도 그런 공간 중 하나였다. 빙고를 살린 건 40세의 젊은 건축가 이의중 대표.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고 귀국 후 인천에 자리를 잡았다. 버려진 공간에서 먹고 자며 뭔가를 하고 있으니, 젊고 서글서글한 인상의 이방인의 등장에 동네 주민들은 촉을 세웠다. 누굴까. 여기에 왜 왔을까. 

 




백년 만에 카페가 된 얼음 창고


빙고의 역사는 인천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1883년 첫 개항 이후 각국의 상인들이 자유롭게 거주할 수 있는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지가 생겨나면서 외국인들이 급증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빙고의 첫 토지 소유주는 독일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4년 각국 조계지가 폐지되면서 밀물처럼 몰려들었던 외국인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고, 일본인의 소유가 됐다. 

 

1917년부터 일본이 본국의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간척사업을 실시하면서 인천 신포동 역시 간척지로 메워지고, 상권이 발달하기 시작한다. 빙고는 1920년대에 지어져 1960년대 후반까지 신포시장의 얼음 창고로 쓰이다가 인천시 교육청으로 소유권이 넘어가 교과서 창고로 쓰였다. 해방 후 미군부대가 들어오고 파라다이스 클럽 등 외국인 클럽의 주류창고로 이용되다가, 번성을 누리던 거리가 새로운 도심 개발로 인해 점차 쇠퇴하면서 이곳도 빈창고로 함께 잊혀져갔다. 

 

 

인천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은 아카이브 카페 빙고는 건축재생공방 이의중 대표가 2015년 1월에 매입하여 공사를 시작했고, 8월에 오픈했다. 죽어가던 공간에 젊은 생기가 돌자 주변의 각종 쓰레기와 악취로 골칫덩이였던 골목에 사람이 들기 시작했다. 지금이야 중목구조를 살린 천장과 연와조, 빨간 벽돌까지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지만, 처음 지붕을 뜯고 벽을 헐었을 땐 막막했다. 

 

간척된 땅이라 지반이 약해서 건물 아래 부분은 썩어있었고, 황토가 덧대어져 있는 벽은 살짝만 건들이면 부스러졌다. 지붕의 허술한 슬레이트 아래 나무 역시 부패되어 일부만 살릴 수 있었다. 화강암으로 기초를 새로 쌓고, 원형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으로 국산 나무를 덧대어 구조를 완성했다. 냉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낮게 만들어진 입구를 키에 맞춰 높이고, 철문은 옛날 모형 그대로 제작했다. 이곳에 얼음을 보관했던 것처럼 우리의 ‘지금’이 녹아 사라지지 않도록 담아두자는 의미에서다. 

 

 

14평 남짓한 공간에 들어서면 긴 테이블 하나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얼마 전 공연을 위해 작업실로 쓰던 2층에 테이블을 몇 개 더 올려두었지만, 애초에 오픈된 테이블은 하나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서로 직접 얘기를 나누지는 않더라도 한 테이블에서 서로를 인지하고 함께하기를 바라는 마음에 고집을 부렸다. 그 덕분일까. 그의 바람대로 빙고는 하나의 상업공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역 커뮤니티로서의 역할도 톡톡히 해내고 있다.

 

 

‘다음’을 만드는 것
재생건축은 제 기능을 잃고 버려진 공간들에 숨을 불어 넣는 일이다. 그리고 ‘다음’이 존재하도록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축보다 재생건축의 공사비가 더 비쌀 수 있어요.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럼 새로 짓지’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사실 재생건축은 당장의 가치 이상을 내다봐야 해요. 신축은 시대적인 흐름이 적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리모델링이 필요한 건물이 되거든요. 그럼 몇십 년 후에는 또 그 건물을 허물겠죠. 그리고 다시 짓고요.”


새로 지은 건물은 20년 후에 20년만큼의 가치를 갖지만, 1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건물은 20년 후 120년의 가치를 가진 공간이 된다. 그시대에 맞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가치는 달라지는 것이다. 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자는 것이 재생건축의 핵심이다. 물론 ‘다음’이 있기 위해서는 개념만으로 부족하다. 결국은 재생할 만한 가치가 없으면 재생건축도 의미 없는 일이니까. 시간이 지난 후에도 건축물이 역사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도록 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거듭해야 하고, 까다롭더라도 오래 지속될 수 있는 재료와구조를 적용해야 한다. 

 

재생건축의 의미를 이해하고 동참하는 건축주를 만나는 것도 중요하다. 재생건축에 대한 의식이 높아지고 있다지만 아직까지는 여전히 외롭고 고단한 여정이다. 재생이 가능한 건물인지를 검토하고 구조에 맞게 설계하는 일의 어려움보다 왜 재생건축을 해야 하는지를 설득하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만의 아카이브를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앞으로는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인천에 버려진 민가를 조사하고 아카이브를 만드는 일을 할 계획이다.

 


 

빙고의 천장엔 100년 전의 나무와 오늘의 나무가 나란히 붙어 있다. 다 썩고 일부만 남은 천장의 나무는 노인의 주름살처럼 시간의 흔적을 온몸에 새겼다. 돌보다 나무에 더 마음이 가는 건 그런 이유에서 일것이다. 자연의 어떤 것보다 우리와 닮아있으니까. 그런 나무들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는 공간을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어 발걸음을 재촉하는 그를 따라 걸으며, 그가 말하는 재생건축은 거창한 건축 개념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시간을 받아들이자는 삶의 태도에 가깝다는 생각을 했다. 있는그대로 세월을 새기면서 다음 세대에게 나이든 공간의 주름진 면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보여주자는 것이다. 그럼 언젠가 하나둘 시간을 축적한 도시가 되어가겠지, 그 도시에서 우리도 아름답게 늙어가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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