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숟가락 특집1] 왜 한국인은 숟가락으로 식사를 할까?

Project / 주영하 기자 / 2018-06-14 15: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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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이시케 나오미치는 세계 여러 민족의 식사도구를 소개하면서 손, 젓가락, 포크·스푼·나이프의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했다. 몇 년 전 70세를 훌쩍 넘긴 이 노학자를 만난 나는 대뜸 물었다. “선생님도 한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한식을 잡수셨는데, 왜 한국인의 숟가락·젓가락 동시 사용을 별도의 분류에 넣지 않았습니까?” 그의 답은 약간 궁색했다. 세계의 식사도구를 분류하다 보니 생긴 결과라는 것이다. 사실 대부분의 이 분야 일본인 학자들은 한국인의 숟가락·젓가락 동시 사용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서양인들이 동아시아인의 식사도구를 말할 때마다 젓가락에 너무 초점을 맞추다보니 세계의 식사도구를 소개할 때 항상 한국은 예외로 취급되었다. 


그렇다면 중국·일본·베트남·미얀마 등 동아시아의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 젓가락만 사용하는 데 왜 한국인만 유독 숟가락과 젓가락 두 가지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을까? 일본의 중국인 민족학자 슈닷세이는 한국의 이러한 현상을 두고 성리학과 연결시킨다. 숟가락으로 밥과 함께 탕·국·찌개를 먹고, 젓가락으로 다른 반찬을 먹는 습관은 고대 중국의 《주례》라는 책에 나오는 예법과 매우 닮았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조선시대 사람들이 철저하게 주나라 때의 것을 모범으로 삼아 식사를 했다는 점이 오늘날까지 한국인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사용하는 이유라고 보았다. 


그의 주장은 사실일 수 있다. 13세기경까지 중국인도 청동기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을 동시에 사용하여 식사를 했다. 그러니 공자도 진시황도, 심지어 서기전 206년에 한나라를 세운 유방(劉邦)도 지금의 한국인처럼 숟가락·젓가락을 동시에 사용하여 식사를 했다. 그런데 13세기 이후 청동기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일 수 있다. 먼저 명나라 말기에 와서 중국인들이 음식을 조리할 때 지금처럼 식용유를 많이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기름이 붙는 숟가락 사용이 줄여들었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다. 또 있다. 송나라 이후 차 마시기가 완전히 일상에 자리를 잡으면서 중국인들이 점차 국물 있는 음식을 먹지 않게 되었다. 이로 인해서 숟가락이 중국인의 식탁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국수와 만두를 주식으로 먹으면서다. 송나라 이후 화북지역은 물론이고 화중지역, 즉 양쯔 강 남북지역에도 겨울밀 농사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인들이 국수나 만두를 주식으로 먹기 시작했다. 숟가락은 곡물로 지은 밥을 먹는 데 반드시 필요했던 식사도구였다. 밀가루로 만든 음식이 주식이 된 화북지역은 물론이고 화중지역에서도 숟가락이 사라지고 젓가락이 유일한 식사 도구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열도에 살던 사람들은 아예 숟가락을 쓰지 않았다. 비록 당나라 때인 나라(奈良)와 헤이안(平安) 시대 지배층들은 경주에서 만든 청동기 숟가락과 젓가락을 사용했지만, 결코 일상의 식사에서 이 두 가지 식사도구를 함께 사용하지 않았다. 일본열도에는 이미 그 때부터 차진 성분의 쌀이 재배되었기 때문에 곡물 밥을 먹을 때 굳이 숟가락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차진 쌀밥을 먹을 때 숟가락을 사용하면 밥이 숟가락에 달라붙어 불편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은 중국 고대의 청동기로 만든 숟가락과 젓가락의 재질이 스테인리스 스틸로 바꿨을 뿐 지금까지도 두 가지의 식기를 사용하여 식사를 하고 있다. 그 이유로 널리 알려진 주장은 한식 상차림이 밥과 국, 그리고 마른 반찬과 젖은 반찬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국이나 젖은 반찬을 먹으려면 숟가락이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인 역시 밥과 함께 국을 반드시 먹는데, 왜 그들은 숟가락을 사용하지 않을까?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용한 식기는 무거운 자기나 놋그릇이었다. 무겁기도 하고 열도 금방 전달되는 이들 식기를 직접 손으로 들고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곡물로 지은 밥과 국물음식을 먹는 데 숟가락은 빠질 수 없는 도구가 되었다.
그렇다면 숟가락은 주로 어떤 재료로 만들었을까? 조선시대 왕은 주로 은으로 만든 숟가락을 사용했다. 왜냐하면 음식에 독이 들어 있으면 은제 숟가락의 색이 바로 바뀌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양반들은 놋쇠로 만든 숟가락을 주로 사용했다.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은 나무로 만든 숟가락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놋쇠로 만든 것의 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김홍도가 그린 그림으로 알려진 《단원풍속도첩》의 〈주막〉이란 그림을 보면, 큰 사발을 들고 밥을 떠는 부상이 사용한 숟가락은 나무로 만든 것이다.
  

그림 김홍도 전, 단원풍속도첩》 〈주막, 28x23.9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래도 김홍도가 살았던 18~19세기가 되면 산골짜기에 사는 사람들도 집에서는 놋쇠로 만든 숟가락을 사용했다. 화폐로 쓰이던 엽전을 녹여서 놋쇠 식기를 만들어 판매하는 장인들까지 있을 정도로 놋쇠 숟가락도 인기였다. 엽전의 값보다 놋쇠의 값이 더 비싸서 생긴 일이지만, 얼마나 놋쇠 식기를 좋아했으면 그랬겠는가. 나라에서는 이런 장인을 붙잡아 곤장 100대의 벌을 주겠다고 엄포를 놓았지만, 그런 장인이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딸을 시집보낼 때 놋쇠로 만든 두 쌍의 주발과 탕기, 그리고 숟가락과 젓가락을 딸려 보냈다. 그만큼 조선후기 사람들은 놋쇠 숟가락을 한 사람의 인격으로 여겼다.

 

 

그렇다고 나무로 만든 숟가락이 홀대를 받은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에도 나오듯이 왕실에서나 민간에서나 상례(喪禮)에서 사용하는 숟가락은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그것도 버드나무로 만들어야 한다고 믿었다. 이 버드나무 숟가락은 다음의 과정에서 사용되었다. 예전 사람들은 어른이 숨을 거두어도 혹시 깨어날지 몰라서 하룻밤 시신을 별도의 방에 모셔둔 후 이튿날 시신을 씻기고 수의를 입혔다. 수의를 다 입힌 다음에 상주는 저승으로 갈 때 필요한 엽전이나 쌀을 시신의 입에 넣었다. 이 행위를 반함(飯含)이라고 불렀다. 《세종실록》에 그려진 나무로 만든 숟가락 역시 이 반함을 할 때 사용했던 것이다. 상주는 망자의 입에 버드나무 숟가락으로 쌀을 떠 넣으면서 “천석이요, 이천석이요, 삼천석이요”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야 저승까지 잘 갈 수 있다고 여겼다. 버드나무로 만든 숟가락을 사용했던 이유는 버드나무가 귀신을 물리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글 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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