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조각가] 자신을 조각하는 작가, 김기엽

Art / 배우리 기자 / 2018-10-11 12:3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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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가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 그 예감을 오늘도 나무에 새긴다.


작가는 왜 두 눈을 버렸을까


대변인으로 말 없는 작품을 두고 있는 말 없는 사나이를 만났다. 이미지로 이야기하는 사람인 그는 별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설명 없이 직관의 세계로 나를 초대했다. 모호한 말들 속에서 문단이 딱딱 맞는 글줄을 상상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지만, 그의 작업을 정말 ‘알것’같았다. 그럴수록 말도 안 되는 질문만 퍼부었지만 말이다.

 

8년 전, 2번째 개인전 이후, 이제야 나타난 그의 작품들은 작가 인생 2기의 서막을 열고 있었다. 나무 조각의 시작은 작가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맞게 된 전환점과 닿아있다. 그는 조각물들로 세워진 도시에서 고전적인 인체와는 다른 현대적인 인체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말하자면 미래의 고전을 위해서다. 그 결심을 실행하기 위해 그는 먼저 자신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지 않고 전통적인 형상에만 가두는 흙과 헤어졌다. 혼자 흙살을 붙이던 작가는 나무의 살을 깎기 시작한 것이다. 온 몸으로 고뇌의 장면을 보여주던 인물들은 은유적이고 부분적인 조각이 되었다. 구상에서 추상이 약간 가미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감정까지 추상화된 것은 아니다. 생략된 인체 속에서 작가의 감정은 오히려 더욱 직접적으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예술가 중에는 관조자가 많은데, 그도 그렇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이 많은 그는 처음에는 ‘자기 자신’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혼자만의 시간이 축적될수록 사물과 주위 환경과의 공감 능력은 더욱 커졌다. 지금은 내가 밟고 있는 땅, 알고 있는 주위 사람, 그리고 내 앞을 다녀간 모르는 모든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쏟는 중이다. 그는 공간적 이웃이든, 역사적 이웃이든 그들이 없으면 자신도 없을 거라는 부채감을 가진 동시에 욕망으로 모든 것을 닦달하는 그들과 같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오직‘나’만을 향한 이기적인 눈을 버렸다. 그리고 마음의 눈에 의지해서 조각을 한다. 초기 작품보다 인체가 생략되었지만 고뇌의 살결은 더욱 자세히 묘사된다. 

 

 

 


욕망의 겹

판재는 사람의 편의 혹은 경제적 욕망에 의해서 가공되어 인위적인 겹을 갖게 된 나무다. 물론 한 줄, 한 줄마다의 나무는 개별 속성을 갖고 있지만, 합판은 여전히 원목보다는 한 수 아래로 취급된다. 작가는 현대적인 인체를 위해 작금의 재료인 합판을 선택했고, 결과적으로 그 선택은 작품을 통해 관람객들이 인간의 삶을 되돌아보게 하면서, 자연에 대한 경외에 다가가도록 하기에도 좋았다. 그는 계획한 작업에 따라 적당한 색상을 가진 합판을 골라 재단을 거쳐 다시 일일이 합해 거대한 덩어리를 만든다. 그리고 마치 그 덩어리가 처음 만난 원목 나무인 양 정성스럽게 파낸다. 그러면 합판은 시침을 떼고 자연의 나이테를 가진 통나무로 다시 태어난다.

‘자각-2’의 비대칭적인 결은 특히나 ‘자연’스럽다. 그러나 알고 보면 거의 모든 합판 작품은 결이 대칭으로 보이도록 제작되었다. 나무가 인위성을 띠면 띨수록 그것이 자연의 소재라는 것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작가는 살아있는 진짜 나무가 아닌 인공의 나무만 남게 될 것이 두렵다. 그렇기 때문에 공장에서 사들인 합판을 매일매일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역설적인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뿌리를 형상화한‘회귀’는 특히 그렇다. 작품은 고통을 멈추고, 자연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부림친다.

‘욕망’의 화신으로서의 합판의 겹, 그리고 다시 그것들을 합친 거대한 겹은 숱한 생명체들의 흔적과 업적, 그리고 죽음이 쌓여있는 것과 같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런 겹 혹은 겁(劫)이 없다면 우리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작가는 “지금 우리는 그들을 밟고 서있다”고 말한다. 땅에 처박힌 해골 덩어리인‘정복자’는 본래 ‘욕망의 덩어리’라는 이름을 가질 뻔 했지만 조금 순화된 것이다. 작가는 해골을 통해 죽음 자체보다는 모든 것의 역사를 추동했던 욕망들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작업에 대한 작가의 욕망도 해골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내 안의 모든 나(every-one)



매체는 바뀌었지만 인간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계속되고 있다. 인간이 스스로를 사유하기 전부터 존재했을 빈 공간, 불안을 표현하기에 인간, 인체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하여’를 보면 지금처럼 작품의 형태가 단순해지기 전에도 그가 인간의 불안이나 고뇌를 표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스스로는 내려올 수 없는 허공에 불안정하게 매달린 노동자(헬스로 부푼 근육이 아닌 노동의 근육으로 보아 알 수 있다)는 그저 세상을 외면하지 못하는 것일 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세상을 향하여’라는 거창한 제목은 공허한 외침이다. 이제 그 단단하던 근육은 단순해지고 인체는 파편화되었다. 합판의 낯선 물성은 모든 걸 인간(얼굴)의 실루엣으로 보는, 인간의‘인간’에 대한 익숙함을 파괴하기에 충분했다. 그런 파괴는 나와 타인과 자연물을 구분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든다.



얼굴만 남은‘자각’시리즈의 표정을 보면 주체를 상실한 현대인의 불안을 그대로 보여준다. 일견 자연스러워 보였던 얼굴의 결들에서는 삶을 지배했던 규칙과 질서를 순간 잃어버린 혼란스러움을 엿볼 수 있다. 자각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깨달아서 안정을 얻는 것이 아니다. 돌을 꼭대기까지 올렸다고 해서 시지포스의 일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자각은 완성도 없고 끝도 없이 불안을 짊어지고 올라가야 한다는 사실을 떠안는 일이다. 차라리 깨닫지 못한 것이 속 편한 일임을‘자각-3’을 보면 알 수 있다. 자각의 시작은 좌절이라는 것도.


또 다른 얼굴에는‘man-evolution’과‘man-시선’,‘ 네 개의 시선’이 있다. 이 조각들은 관람객이 전시장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그를 쳐다보고 있다. 그의 조각은 우리의 시선을 기대하는 수동적인 대상이 아닌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텅 비어 아무것도 비칠 것 없는 눈은 우리를 더 부끄럽게 만든다. 누군지도 모르는 누군가가 날 본다고 느끼는 순간의 기이함도 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눈을 감고 있든 눈을 뜨고 있든 간에 조금 예민한 사람이라면 모든 조각에서 시선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 시선이 늘 우리 곁에 있는 자연 혹은 사물의 시선이라고 설명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우리도 자연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의 시선은 바로 자각을 위한 내면의 시선이 되기도 한다.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은서로 눈을 바꿔가면서 서로를 응시하게 된다.

서로에 대한 응시가 너무 가까워지면‘love'가 된다. 너무 붙어서 서로를 좀먹는 두 사람은 떨어지려는 욕망도 갖게 된다. 너무 멀어도, 너무 가까워도 위험한 자연과 인간처럼 말이다. 작가는 언젠가 인류가 사라질 것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가 서로의 밀접한 관계들로 읽어낸 사랑은 파괴를 상상함으로써만 표현 가능했던 것이다.

 

 

폐목의 갗 


작업의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면서, 아니면 흙과 작별을 하고 난 뒤 재료로부터 자유로워졌다. 아니 자유로워야만 한다. 매 순간 다가오는 직관과 공감의 순간들을 모두 합판에만 담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는 폐목으로 작업을 했다. 구두한 켤레가 벽에 외로이 설치되어 있는 것은 ‘경계’다. 더 이상 주인이 없는 그 구두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리킨다. 바위 위, 혹은 다리 위에 놓인 신발을 보고 익숙한 듯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까. 누군가의 신발을 보고 죽음을 자각한 사람은 역시 심연을 빠져나올 수 없다. 누군가 신지 않은 구두는 그걸 알려줄 만큼 쓸모 있다.

‘탈피’ 역시 폐목 작품으로, 마감은 유채 채색이다. ‘탈피’와 ‘경계’의 공통점은 색이 같다는 것인데, 여기에서 그는 나무에게 다른 무엇을 지시하게 한다. 바로 가죽이다. 의도적으로 나무를 자연스러운 가죽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식물과 동물의 경계도 와해된다. 더 나아가서 점퍼는 자신을 가죽처럼 입는 사람과의 경계도 무너뜨린다. 이렇게 그는 주체를 꾸준히 치환함으로써 사물에 대한 공감을 권유한다.



‘두 개의 기둥’은 가지치기한 앙상한 나무들의 살려달라는 외침과 절규의 손짓을 보고 제작한 작품이다. 나무의 갈라진 틈을 그대로 살려 잿빛으로 채색한 이 작품을 보면 그는 자신과 자연, 타인과 자연을 구분하지 않는 감정이입의 대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들을 다 본다면 전시장에서만 공감하고 일상은 이전처럼 지내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작가의 감정을 백분지 일이라도 얻어갈 수 있다면‘인류와 애완동물만 남는 상황’은 오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조형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기 시작한 그의 다음 작품들도 곧 보길 기대해 보지만 작가가 타인의 언어를 삭이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하는 데는 다시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동안 작가처럼 모든 사물 이면을 보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연습을 하다보면, 그의 다음 작품을 감상할 땐 어리석은 질문 따위는 하나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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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 인터뷰]



작품에 있어, 재료로서 혹은 오브제로서 나무는 어떤 의미인가.
: 제 작업에 있어서 목 재료(나무)는 자연과의 소통과 교감을 할 수 있는 통로라 생각한다.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측면에서 나무는 어떤 존재인가.
:흔한 것들 중에 중요한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 공기, 물 등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 일상생활에서
일회용으로 쓰이는 많은 재료들이 나무로 이루어 진 것들이 많은 것을 보면 나무 역시 인간 생
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은 분명하다 생각한다. 하지만 너무 과하게 사용되어지는
것 같아 좀 미안해 질 때가 있다.

자신의 나무 작품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과 그 이유는.
: ‘경계’라는 작품으로 목재로 만든 작품이지만 표면의 질감은 가죽의 느낌을 가지고 있어서 나
무와 동물 즉 생물들이 서로 연결된 듯한 느낌이 받는다.

조각이라는 장르에 있어서‘목조각’의 의미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 조각재료(석재, 점토, 목재, 철 등)들은 각자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유독 목재만은 특유의 향
을 가지고 있어서 조각하면서 기분이 좋아질 때가 있다. 목재는 무생물 보다는 생물에 가까운
재료라 생각된다. 그래서 다른 조각과는 다르게 생명을 다룬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관람객들이 작품에서 꼭 느꼈으면 하는 것은.
: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면서 느꼈으면 하는 것은 너무 흔해서 천대받고 일회용으로 소모되는 것
들의 소중함과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로써 굴레를 벗어날 수 없으며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를
되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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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엽│젊은 조각가 김기엽은 한남대 미술교육과, 동대학원에서조소를 전공하고, 이제 막 세 번째 개인전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묵묵한 그는 주로 대전에서 활동하며 수많은 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수상 경력도 화려하다.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그의 활발한 활동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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