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광천 장기방, 바깥가구들, 바깥양반들

Life / 배우리 기자 / 2018-03-23 11:2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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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절역 신흥교 장기방이라고 하면 우편물도 배달되는 곳이다. 2006년에 처음 생겨서 10년 동안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직접 꾸며왔다고 한다.

 

젊은 시절 집 안에 영역 표시를 미처 하지 못한 남자들의 구역은 불광천 변을 통틀어 하나가 있다. 신흥교 다리 밑 남성들의 휴게 공간 ‘불광천 사랑방’, 일명 ‘장기방’(간판도 있다)이다. 새절역 신흥교 장기방이라고 하면 우편물도 배달되는 곳이다. 2006년에 처음 생겨서 10년 동안 그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직접 꾸며왔다고 한다. 마루 위에는 앉은뱅이 책상과 좌식 테이블이 있는데 ‘장기방’답게 모두 바둑판과 장기판을 장착한 기능 테이블이다. 먹줄로 튀긴 네모칸들까지도 모두 일상 목수들의 솜씨다.


집 바깥의 가구



일상 목수들에게도 의자제작은 약간 짐인 모양이다. 입식 책상에는 제각각 다른 곳에서 온 원목 테이블 의자가 놓여 있다. 사실 자전거를 타고 슥 지나가는 내 발길을 잡고 고개를 돌리게 만든 것은 장기 한 판이 아니라 이렇게 나와 있는 가구들이다. 집에서 오랫동안 쓰고 닳아 수명을 다했는데 바깥양반들의 손에 들려 불광천 사랑방으로 출동한 것이다.

 

집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가구들로 꾸며진 (역시 집에서 할 일 없는) 바깥양반들의 아담한 보금자리는 흥미로우면서도 울적한 면이 있다. 철사와 테이프로 응급처치 된 것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의자들은 나름대로 발랄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빈티지 믹스매치 스타일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지만 나름대로 귀족풍 혹은 아르누보 풍의 조각에 좌판과 등받이 가죽이 아직 멀쩡한 친구들도 있다. 지금은 대리석 테이블이 아닌 합판 테이블 앞에 놓였지만 예전의 영광을 가진 기품은 여전하다. 물론 원목 의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 의자, 학교 의자, 철제 의자, 사무용 의자까지 그 종류도 다양하다. 바실리 체어 사촌, 윈저체어 후손도 있다.

 

 

사랑방 중심까지 들어가지 못하고 바깥의 밖에서 서성이는 것들도 있다. 겨울에는 아무도 찾는 사람이 없어 버려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이 200명까지도 모이는 여름에는 없어서 못 앉는 귀하디귀한 몸들이다. 사랑방 총무 추산 의자는 50점. 회생할 수 없었을 체리빛 의자는 누런 장기판과 장기알통을 양쪽에 달고 매끄런 다리만 남은 채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이 장기테이블은 장기방 사람들 사이에서도 모든 부분이 자투리판으로 만들어진 다른 테이블보다 인기가 높다. 적정기술과 만난 제 2의 일상은 풍요롭기 그지없다.

우리, 다니엘 브레이크


 

 북풍이 불고 가지 못했던 불광천 사랑방 겨울 풍경은 여름과는 사뭇 달랐다. 합판으로 하나하나 벽을 만들어 다리 밑에 거대한 방이 만들어진다. 그 벽에는 장기를 두는 민속화풍의 벽화도 그려져 있어 나름 운치도 있다. 어두운 조명에 의지해서 바람만 피한 이 시대의 아저씨들은 여름과 못지않은 활기를 보이며 머리보다 빠른 입으로 왕년의 솜씨를 자랑하며 장기 알을 턱턱 둔다.


이 곳을 지나갈 때만다 약간 젊다는 이유 하나로 나는 감히 다니엘을 추모하게 된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에서 목수‘였던’ 주인공 다니엘은 나이 들고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사회에서는 천덕꾸러기가 되어 좌절과 거의 하나가 될 뻔했다. 하지만 이웃에게 사랑과 희망을 불러 일으켜주는 그는 여전히 건재했다. 불광천 사랑방의 사람과 가구들은 다니엘 블레이크를 떠오르게 한다. 존재를 굳이 내세우지는 않지만 스스로 일상을 가꿀 줄 아는, 그런데 잠시 사회와는 맞지 않는 약간의 슬픔을 간직한 사람들과 사물들은 모두 다니엘이다.

 

 

사실 내가 다니엘이다. 우리는 모두 다니엘 블레이크다. 태어날 때 이미 ‘나’만의 삶에서 은퇴해버린 우리는 구직수당도 의료수당도 받을 수 없으며 갈 곳도 없어 다리 밑에 잠시 기거하는 사람들이다. 뭔가 하나씩 고장 났거나 고장 날 예정이지만 나름대로 지금을 살아가고는 있는…. 그래도 그렇게 슬프지 않은 건, 우리가 아무리 고장 나더라도 보듬고 쓰다듬고 고쳐줄 서로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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