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허우중, 그의 아슬아슬한 절단면

Art / 배우리 기자 / 2018-02-23 01: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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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 같기도 하고 만화 같기도 한 단색의 그림들. 자연, 고요함, 평화로움과 동시에 파열과 재해, 그리고 절규를 떠안은 어둠은 신시티나 고담시티의 어느 밤을 연상하게 한다.

나무 그림이야 세고 셌다. 어쩌면 유행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시대의 결핍인 자연을 작가들이 주 소재로 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작가의 작품은 조금 달랐다. 살아있는 그대로이자 ‘다듬어진’ 나무였다. 쉽게 말하면 목재. 목재를 그린 사람이 있던가. 잘 모르겠다. 생생하거나 시들한 나무는 어쨌든 많이 봐왔는데 이 작품은 분명 다르다. 그에게 나무는 추상적으로 그저 보호해야 할 ‘자연’이나 심적 고향이 아닌 우리와 운명을 함께 하는 구체적인 물질이자 동반자다.


알게 모르게 나무 


프랑스 유학시절 이방인으로 살면서 경험한 타자로서의 삶이 허우중 작가의 관조적인 성향을 더욱 부추겼다. 그는 초기에 소통 없이 각자 자신만의 삶을 살아가는 군중을 그렸다. 이어지는 2013~14년 작업들에서는 온전하지 못한 정보로 이루어진,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완벽하게 포착할 수 없는 한국의 사건과 사고를 자신만의 메타포로 그려냈다. 그는 진실을 가리는 허구를 걷어내기 위해 더 비현실적인 만화나 그로테스크한 영화의 프레임을 차용했다. 당시 그는 데이빗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즐겨보았다고 한다.


2014년작 “Labyrinth(미궁)”은 즐겨보던 작품들의 영향을 받아 극단적인 명암과 원근법을 활용해 그린 기괴한 이미지의 작품이다. 화면 앞에 미로가 테이블에 받쳐져 있다. 사람들은 난공불락의 미로를 지으면서 스스로를 가둔다. 그런데 그걸 받치는 테이블은 그 질감으로 봐서 나무다. 뒤틀리고 개미들이 파먹어서 언제든 부서질 것 같이 위태로워 보인다. 도대체 우리가 서있는 곳은 어디며 짓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작가는 의심한다. 나무는 허우중 작가의 작품에서 이렇게 등장한다. 작가에게 체화된 소재라서 굳이 설명을 하는 것이 이상하지만 우리의 지반으로 표현되는 ‘나무’는 튼튼하게 짓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약하고 약한 것이며, 이것을 돌보지 않으면 무엇이든 사상누각이 된다. 썩은 나무가 무너지기 전에 (그림이 여러 시점인 것처럼) 우리도 여러 시점으로 우리 주위를 둘러보아야 할 것 같다.

 

  

뾰족한 균형


한국에 돌아오고 그가 그려왔던 정치적 상황에 더 가까워졌지만 이전 작업의 주제들이 그리는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것을 벗어나는, 수단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미쳤다.


2016년의 작품들은 회화에서 드로잉으로 넘어가는 중간 지점으로 본인이 그린 것을 오려서 콜라쥬로 작업했다. 여전히 그에게는 서사가 중요하지만 그 서사는 사회적인 이슈에서 조금 더 근원적으로 들어갔다. 그러면서 목재가 적극적으로 그의 작업에 잠입해 들어왔다. 도끼로 찍어내 원뿔이 된 통나무와 나무로 된 작업대와 이젤 등은 사회 및 자연과 작가의 관계 탐구의 주된 재료다. 어느 사건이든 불안 속의 굴레로 몰아넣는 그는 ‘순환하는 고리’에서 그 방식을 극대화해서 표현했다. 도끼가 여러 번 지나간 위태로운 나무 기둥에는 작은 집이 있고 이 집은 통나무와 끊임없이 맞물린다. 어디가 시작이고 끝인지 혹은 잘못 된 건지 알 수 없이 쓰러지기 직전의 균형을 맞추어야 하는 상황이다.


환상적이면서도 실재적인 나무. 이미 나무는 이젤이 되고 테이블이 되었지만 그림의 소재가 될 만큼의 나무는 지켜야 한다. ‘사냥’에 등장하는 작가는 붓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데 그는 시위를 놓을 수도 더 당길 수도 없는 처지다. 그저 나무를 계속 그려나가야 한다. 결국 훼손과 보호의 균형을 맞추어나가는 건 작가 본인이다.

 


목수의 이중성


‘포템킨 풍경’. 도끼로 찍어낸 통나무의 절단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작가의 분신인 나무를 톱질하는 목수가 있다. 테이블, 의자, 사다리가 그의 손에서 탄생된다. 그리고 그는 나무로 산을 닮은 무대 장치를 만들었다. 나름 뾰족하고 높고 반듯하게, 그렇지만 균열의 흔적이 이따금씩 보인다. 톱질(그리기)은 삶을 영위하기 위해 벌이는 필연적인 행위로 보이지만 그림 전체를 보면 그 결과는 단순하지만은 않다. 나무와 목수는 하나의 몸이며, 하나의 생명체다. 하지만 나무의 목숨을 끊음으로서만 살아갈 수 있는 목수와 나무로 만든 이젤을 가져야만 하는 작가로서 그리고 지구인으로서 허우중은 아슬아슬한 삶의 균형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깃발이 쓰러지기 바로 전의 모래성이고, 작가는 그 게임을 계속 해야만 한다.


현재 그는 무엇을 그리는가보다 그리는 행위, 모래성 게임에 집중하고 있다. 매일 아침 일어나 자신이 선택한 사물을 그린다. 어떤 이유나 설명도 붙일 필요가 없는 자신을 찾아가기 위해 매일 드로잉이라는 지도를 조금씩 그려나가는 중인 것이다. 이쯤에서 오글거리는 클리쉐를 하나 밝히자면, 그가 초중고 시절을 모두 공주의 태화산 자락에서 보냈다는 것이다. ‘나무’와의 친숙함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러고 보면 2012년의 한 작품에는 제페토 할아버지가 등장했다. 그는 피노키오의 팔이나 정강이로 추정되는 조각들과 대팻밥 사이에서 원뿔을, 아니 빈 말풍선을 깨고 있다. 아무것도 포착할 수 없는 우리들, 무언가를 만들지만 그것이 완전하지도 않다. 그 당시 이런 내용은 사회에 보내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지금은 본인이 하는 작업에 대해서도 의심하고 해체하면서 그 메시지를 스스로에게 보내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겨웊숲의 커다란 나무처럼 자라는 중이다.

 

 

허우중 | 고등학교를 마치고 일찌감치 파리 에콜 데 보자르에서 유학했다. 강산이 한 번 변하고야 돌아왔고, 지난 해 잠시 찾아온 슬럼프를 딛고 일어나 현재 경기창작센터에서 전답을 바라보며 해체적인 드로잉을 실험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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