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라선영: 인간에 대한 조각 보고서

Art / 육상수 기자 / 2018-03-05 00: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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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밑에 놓인 사람을 만나 적이 있는가.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이라면 몹시 당황스럽지 않겠는가. 서둘러 어느 젊은 조각가를 만나야 한다.

 

우리는 눈앞의 현상을 사실 혹은 진실로 수긍하면서 살아간다. 그럼에도 조각가들은 그 사실과 진실 너머의 의미를 찾기 위해 매일 조각을 한다. 현상 이면의 본질을 찾아보려는 것일 텐데, 그렇다면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탐구하고 현상 속에서 존재의 본질을 포착하는 작업을 조각이라 불러도 되는 걸까? 조각은 물질의 형상이면서 동시에 의미를 암시하는 존재성이다. 그래서 조각가는 의무처럼 세상을 조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조각에 대한 어느 아티스트의 수사


‘타인의 얼굴이야말로 철학에서 가장 핵심적 소재’라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 레비나스(Levinas)의 정의에 따른다면, 얼굴에는 문자화 되지 못한 수많은 중의(重義)가 담겨 있다. 따라서 조각가가 얼굴이 조각했다면 암시, 역사, 기운, 형식, 이력 등과 같은 난해한 의미들이 함께 포함되었음을 의미한다. 조각가는 이 난해함을 해독하는 예술가이다.

 

 

30세의 여성 조각가 '라선영'이 빚은 군집의 인체 조각은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는 틈새로 의문과 긴장이 숨어 있다. 사람이 조각이면서, 조각이 사람인 그녀의 30센티미터 남짓한 조각들은 관람객의 바짓가랑이 아래에 멈춰 서 있다. 만약 그의 조각들을 보면서 우주에서 본 지구가 동네 문방구의 지구본처럼 느꼈다면 그것은 우리 이웃에 대한 무지와 경멸의 태도이면서 스스로에게 씻을 수 없는 과오를 남기게 될 것이다.

 

 

라선영은 ‘군중’에 대한 이야기와 가능성을 시리즈로 풀어가기 때문에 ‘서울, 사람’ ‘광화문 사람들’로 이어지는 사람 조각 연작을 전지적 관점으로 탐색해야 그의 작품세계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라선영의 작업은 조각이기 이전에 결국 사람들에 관한 관찰 보고서이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단순한 형상의 탐색이 아니라 깊은 관심과 애정에서 출발해 사람이라는 객체의 근원에 도달하고자 하는 예술적 조형의 여정이다.


비관주의자는 보이는 모든 것을 허상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지만, 라선영의 근원에 대한 긍정의 시선에는 몸살 뒤 원기회복을 통해 얻는 치유의 고통을 목격하고 예방하고픈 갈망이 서려 있다. 라선영의 두 번째 개인전 ‘BEAM’은 마천루를 향해 기어오르는 가당찮은 인간의 욕망을 고발하는 것이면서, 우리가 소망하는 이상향에 도달하고자 끊임없이 전진하지만 정작 그렇게 도달할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고 있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표현한다. 타자란 까닭 모를 암흑의 존재이면서 무한성의 대상이기도 하다. 타자를 부정하는 것은 실체에 대한 반기이고 긍정은 실존을 위한 시그널이다. 그리고 우리는 작가의 이런 의도를 놓쳐 선 안 된다.

 

 

70억 개의 얼굴, 70억 개의 세상


작가는 “우리는 고작 100년 전의 생활은 상상할 수조차 없으며 지구촌이라고 불리는 이 시대에도 지구 반대편에는 다른 문화의 사람들이 다른 말을 쓰며 다른 음식을 먹고 다른 식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끊임없는 전쟁과 변화, 그리고 다양성의 폭풍 속에서 인류는 살아 왔다”고 말한다. 세상의 중심은 ‘나’였음을 진단하면서 동시에 인간이 하는 대부분의 일들은 결국 타인에게 존재를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이며, 그것은 타인이라는 존재의 시선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한 칼럼에서 밝혔다. 라선영이 보는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70억 명의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70억 개의 세상이 중첩된 곳이다.

 

 

 

그리고 라선영은 “너무나도 다른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자신을 중심으로 이 좁은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은 어찌 보면 재앙”이라고 진단한다. 그의 진단과 해석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야 존재가 구성되고 존재의 이유가 확립되기 때문에 부대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자각한다. 그리고 이 존재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 곧 라선영 조형 언어의 출발인 셈이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이면서 타인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아를 발견하기 전에 타인을 먼저 단정하는 것이 우리들의 습관적 행위다. 타인에게서 자신을 발견하는, 내 앞의 실체를 통해 자신의 부재를 알아채 가는 것이 우리들이다. 타자의 얼굴보다 자신의 얼굴이 더 낯선 이유가 그래서다. 작가는 이런 비정한 현실을 한 치라도 교정하기 위해 부단히 세상을 직시한다. 태생적 직관력을 도구로 현실을 예리하게 포착하는 것도 작가의 몫일 것이다.

 

라선영의 조각에 담긴 ‘무엇?’과 ‘왜?’에 대한 집요한 질문은 작가의 직관력이 포착한 존재의 표상이기도 하다. 바닥에 엎드려 조각의 얼굴을 맞대어보면, 조각들은 저마다의 얘기를 쏟아내느라 분주하다. 나와 당신은 누구인가요, 왜 사는 건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따위. 전시장 바닥에서 그들의 얘기에 귀를 귀울이다보면 세상에 대한 방관함과 무정함을 돌이켜 보게 된다. 그런데 나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주나? 곧 기운이 쇠락하지만 작가에게 의지해도 될 지를 문의한다.


근원적으로 사랑하는 법


라선영은 인간을 탐구하는 조각가이다. 그러기 위해서 부단히 세상을 연마하고 있다. 절대라는 고독의 늪에서 그렇게 간절한 것이 무엇인지를 더듬어가면서, 삶의 텍스트를 조각한 더미 속에서 완전한 결정체를 찾아가길 소망한다. 서른 살 작가의 인간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식지만 않는다면 그것이 돈오돈수(頓悟頓修)든, 돈오점수(頓悟漸修)든 더 큰 별이 되어 지구의 삶을 조망할 것으로 믿는다.

 


 

라선영은 우주의 관점에서 우리는 ‘그냥 있을’ 뿐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음을 고백한다. ‘예술가는 상상력의 성직자’라는 말처럼 그녀는 매일 사람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고, 조각한다. 그것도 무려 70억 명의 인간을, 70억 개의 지구를, 70억 개의 세상을, 70억 개의 삶을 조각할 계획이다. 이것은 불립문자(不立文字)도, 불립조각(不立彫刻)도 아닌 무모한 선언일 수도 있다. 굳이 이 황당한 계획에 대해 물어보지 않았다. 대신 그 상상의 원초적 근거가 궁금했다. 하지만 이것마저도 아직 때가 아니라 단정했다.


12월 초, 눈 흩날리는 날에 강원도 정선의 카지노 근처를 얼쩡대는 라선영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재물과 영혼을 강탈당한 도박꾼들의 민낯을 만나보기를 권고한 때문이다. 삶의 직격탄을 가슴 한 가운데에 피격 당하길 강요한 것이다.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과도한 요구를 청한 것 같아 무례했지만, 서른 살의 라선영 작가에 대한 무한한 기대의 표식쯤으로 여겨주면 좋을 것 같다.

 



라선영 | 인체 조각으로 인간의 다양한 이야기를 하나하나 풀어 가는 조각가다. 이화여대에서 조소과 학사를, Royal College of Art에서 Sculpture MA를 취득하고 서울과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다. 코너아트스페이스, 한화 63스카이아트뮤지움, 카이스갤러리 등에서 개인전을, 문화역서울284, 서울특별시청, 카이스갤러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등에서 단체전을 가졌으며 한화작가지원프로그램, 서울예술재단에서 수상하였고 이화여자대학교와 수원대학교에 출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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